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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

48. 바위에서 찾은 부처님 마애불(磨崖佛)

by 혜림의 혜림헌 2024. 11. 8.

마애불의 마애(磨崖)’는 바위를 갈아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나라 방방곡곡에는 단단한 화강암이 다수 분포되어 있습니다.

마애불은 단단한 바위에 돋을새김이나 선각(線刻)으로 바위에 숨어 계시던 부처님(佛身)을 드러나게 한 불심(佛心)의 결과물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서산 마애불을 비롯하여 경주 칠불암·골굴암, 고창 도솔암, 파주 용미리, 남원 신계리와 여원재, 해남 북미륵암, 구례 사성암, 안동 제비원 등 수많은 마애불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서산 마애삼존불은 각각 과거, 현재, 미래를 상징하는 갈라보살, 석가여래, 미륵보살 등 삼세(三世) 상을 섬세하고 온화한 모습으로 돋을새김하여 백제의 미소라는 명성을 얻었습니다.

마애불은 돋을새김보다는 구례 사성암처럼 간결한 선각으로 조성한 예가 많은데 물론 선 하나로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만큼 우리 장인들의 솜씨가 빼어납니다.

 

중국에는 윈강·룽먼·둔황의 3대 석굴과 71m 높이의 초대형 러싼 대불이 있고, 파괴되었지만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 석굴, 인도에는 아잔타 석굴 등 세계적으로도 수많은 마애불이 조성되었습니다.

 

외국의 석굴사원을 보면서 단단한 돌에 어찌 굴을 만들어 섬세한 조각을 할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만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들 석굴은 대부분 사암(砂巖)과 석회암(石灰巖)에 만들었습니다.

사암이나 석회암은 상대적으로 부드럽고, 사암은 시간이 지나면서 단단히 굳기도 해 섬세한 불상이나 동굴법당 조성에 유리합니다.

 

마애불을 참배할 때마다 일부를 제외하면 투박하고, 못생긴 조각 솜씨에 실망감을 보이기도 하는데 이에 대한 변명을 해 봅니다.

한반도는 제주도와 강원도 철원군의 현무암 지대를 제외하면 국토 대부분에 아주 단단한 화강암(花崗巖)이 분포하고 있습니다.

근세 이전까지 우리가 가진 장비와 기술, 그리고 경제력은 화강암 채취와 불상 조각, 동굴을 조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습니다.

 

우선 높은 바위에 매달리는 작업상의 위험과 어려움입니다.

크레인이나 사다리차는 물론 비계 같은 안전장치도 없었을 터이니 기껏 사다리나 줄에 매달려 돌을 다루기가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다음은 화강암이라는 단단한 돌을 다룰 기계 기구의 원시성입니다.

장인의 기술력을 말하지만 그렇다 해도 연장이 반 몫을 합니다.

그 외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충분한 자금과 시간입니다.

개인의 원력으로 부족한 자금력과 시간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자금 부족은 빼어난 장인(匠人)을 고용하여 긴 시간 공사를 이어갈 여력이 되지 않으니 죄라면 돈이 죄가 됩니다.

그럼에도 경주 남산 등 전국 각지에 걸작을 남겼음을 기억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애불(석굴사원)은 교통과 교역의 중심지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일까요?

교역은 고수익을 얻을 수 있는 만큼 고위험을 동반한 사업입니다.

황하를 건너 타클라마칸 사막과 텐샨·쿤룬산·파미르를 넘어야 하는 실크로드의 폭설, 추위, 모래폭풍은 상인들의 생명을 위협합니다.

더하여 사나운 늑대와 험상궂은 강도들이 목숨을 노리고 있습니다.

오직 부처님의 도움으로 안전한 장삿길이 되기를 소망하게 됩니다.

다행히 수입은 좋았으니 막대한 비용을 시주하여 스님을 후원하고,

장인을 고용하여 바위를 깎아 불상을 조성하고, 불화를 그립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중국과 해상교류가 활발했던 서해안의 서산·태안에 마애불이 다수 조성되고, 조선시대 숙박 시설이 있던 파주 혜음원 용미리와 안동 이천동 제비원에 마애불이 조성되었습니다.

한양으로 가는 뗏목과 조운선이 다니던 남한강 변 뱃길마다 지금은 터만 남았지만 고달사, 흥법사, 법천사, 거돈사가 웅장했습니다.

 

천년의 비바람에 사찰은 폐사지가 되고, 불상의 모습도 두루뭉술 망가졌으며, 오똑하던 콧날도 아들 낳기를 소원하던 아낙의 손길에 떨어져 나갔지만, 불심의 본질이 변하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마애불 앞에 설 때마다 그 장구한 세월을 버텨주심에 감사합니다.

(서산마애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