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에서는 우리가 오욕락(五欲樂) 즉 재색식명수(財色食名壽)의 다섯 가지 쾌락에 물드는 행위를 경계합니다.
하지만 하근기 중생들에게 저 높은 깨달음의 경지는 애써 노력하여 도달하기 보다는 미리부터 겁먹고 포기하기 쉬운 자리입니다.
그에 반해 오욕락은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에너지의 근원입니다.
산신과 칠성, 독성은 민간에서 숭앙되는 신앙의 대상이었습니다.
즉 중생들이 오욕락의 성취를 비는 삼성각(三聖閣)은 무상과 무아, 연기를 말하는 불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불교와는 관련이 없음에도 사찰마다 삼성각이 지어지고 삼성신앙이 유행하게 된 데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중생들의 바람은 소박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저 굶지 않을 만큼의 재물을 얻어 가끔 친한 이와 맛있는 저녁을 먹고, 추하지 않고, 건강하게 살고, 자식들이 잘되었으면 합니다.
불가에서는 그런 소박한 바람마저 버리라 하니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래서 중생들의 소박한 바람과 불교가 타협을 하게 됩니다.
가까이에서 재물을 주는 산신(山神)과 새 생명을 주는 칠성(七星), 복을 주는 독성(獨聖)이 사찰에 들어오게 된 이유로 보입니다.
보다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왕조는 불교의 종파를 통합하고 사찰의 주 수입원인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는 탄압을 가속합니다.
백성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생명을 위협받고 양반의 횡포가 더해져 기아와 병고에 시달리는 고달픈 삶이 이어집니다.
탄압받는 불교는 생존을 모색하고, 고달픈 삶을 이어가는 백성들은 의지처가 필요하니 산신, 칠성, 독성신앙이 사찰에 들어옵니다.
국토의 70%를 차지하는 산은 민중들의 삶의 터전입니다.
산이 아니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음에도 호환(虎患)을 자주 당하니 두려움과 함께 경외하는 마음이 산신을 사찰에 들인 이유입니다.
매일의 날씨에 목숨이 달린 바닷가 사람들은 용왕님께 의지합니다.
바닷가나 섬에 있는 사찰에서는 용왕이 산신을 대신하게 됩니다.
칠성도 별자리를 보면서 날씨를 점치고 아들 하나만 점지해 주시라 빌던 바람들이 모여 사찰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독성은 우리 고유의 신앙이 아닙니다.
중국의 도교와 밀접한 관련으로 우리나라에 유입된 신앙입니다.
다만 비 불교적인 신앙이 사찰에 들어오니 면이 서지 않습니다.
사찰에서는 삼성각에 대궐 전(殿)자 대신 집 각(閣)자를 써서 위계질서가 부처님과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는 묘수를 발휘합니다.
전각의 규모도 작게 하고, 사찰의 한적한 위치에 배치합니다.
처음에는 산신과 용왕, 칠성, 독성을 따로따로 봉안하였습니다.
집을 세 채나 지으려니 재정적인 부담이 커집니다.
형편에 따라 한 집에 세분의 성인을 모시기로 하니 삼성각입니다.
세상사 정해진 법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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