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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

8. 사찰의 입지와 전각

by 혜림의 혜림헌 2024. 1. 31.

사찰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닦고, 지키고, 널리 폄으로써 개인의 해탈을 도모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곳입니다

부처님 당시 출가 수행자들은 걸식하고(托鉢), 재활용 옷을 입고 (糞掃衣), 나무 밑에서 생활하고(樹下坐),

발효약으로 병을 고치는 (腐爛藥), 사의지(四依止)를 기본으로 생활하였습니다.

즉 일정한 주거 없이 유랑수행하는 청정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인도의 우기(雨期)는 폭우가 잦고, 고온다습하여 출가자의 유랑수행에 큰 장애가 되었습니다.

기어 나온 벌레를 죽이게 되는 불가피한 살생, 오염된 물은 위생을 위협하고,

금품과 생명을 노리는 도적 떼까지 유랑을 방해합니다.

우기에 한 곳에서 수행하는 우안거(雨安居) 제도가 도입됩니다.

 

우안거를 위해 만들어진 간이 시설이 바로 비하라(사찰) 입니다.

사찰은 사원, 정사, 승원, , 암자라고 부르는데

스님들이 한 곳에 모여 수행하는 곳을 말하는 가람(samgharama)에서 유래합니다.

 

최초의 사찰은 인도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이 석가모니부처님께 기증한 죽림정사(竹林精舍)입니다.

중국은 후한 황실의 영빈관으로 사용되던 백마사(白馬寺)입니다.

우리나라는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고 3년이 지난 375(소수림왕 5)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佛蘭寺)가 건립됩니다.

 

대부분 왕조에서 불교를 수용하고 지원한 이유가 궁금해 집니다.

불교 교리와 왕의 권위를 동일시하니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됩니다.

백성들에게 왕즉불(王卽佛) 왕이 곧 부처임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사찰도 왕실의 지원으로 도성 내 시가지 중심부에 건립하고

성대한 낙성식과 법회를 열어 국왕의 권위를 과시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신행 행태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신라 말기에는 참선수행을 중시하는 선종(禪宗)이 전래 됩니다.

하지만 중생도 깨치면 부처라는 선종의 평등사상은 지배층의 권력 강화가 최 우선인 중앙귀족과는

태생적으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선종의 수행자들이 지방 호족세력의 후원으로 심산유곡에 수행처를 마련하고

구산선문을 개창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건축은 기본적으로 지형과 물, 토질을 바탕으로 건축재료를 더해

당시의 과학기술과 예술, 종교, 인본주의가 집약되어 건설됩니다.

집터를 닦고,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고, 하방·창방·평방과 도리를 결구하고

서까래 위에 기와를 얹는 목조 건축물이 한옥입니다.

개성이 있고, 처마 선도 아름답고, 자연과의 조화도 일품입니다.

한옥을 예찬하고, 조상들의 건축술을 극찬하는 글들의 내용입니다.

다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조금은 민망한 부분이 있습니다.

 

견고성이 뛰어나지만 다루기가 쉽지 않은 벽돌, 시멘트, 화강암, 대리석 등 우수 건축재료는

수원화성 축조, 묘지조성, 조탑(造塔), 축성(築城)을 비롯한 공공건축 외에는 쓰임새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선조들의 경제력과 기술력이 미치지 못했다는 방증입니다.

 

한반도의 건축은 극과 극을 오가는 기후가 감안되어야 합니다.

여름과 겨울의 온도차는 60를 넘고 호우와 폭설이 반복됩니다.

집중호우는 지반을 약화시켜 석재 등 중량재료를 쓸 수 없습니다.

온돌 난방은 2층 이상 건물에는 적용이 불가능 하였습니다.

이러한 여건에서 최상의 가성비 건축물로 한옥이 발전하게 됩니다.

 

목조건축은 화재와 습기에 취약하고 내구성도 떨어집니다.

표준화마저 어려워 건축비를 아끼는 방법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험한 산에서 기둥과 보에 사용되는 대형수목을 벌목하여 운반하고,

석축을 쌓아 대지를 조성하는 건축공사는 많은 비용이 소요됩니다.

당시의 경제 규모를 감안하면 건축공사에 소요 되는 인력과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재력가는

왕실 등 소수에 불과하였습니다.

 

기념비적인 건축물은 지속가능한 재정력이 만들어 냅니다.

기둥과 서까래의 굵기로 건축 당시의 재정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직후 건축된 사찰의 전각을 살펴보면 기둥이나 각종 보와 서까래의 굵기가

이렇게 작을 수가 있을까?’ 하며 놀라곤 합니다.

이는 전란으로 불타버린 궁궐이나 관청, 사찰, 민가 등을 다시 짓기 위해 필요한

목재와 기술자의 수급이 여의치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장점이 많은 한옥이지만 번듯한 한옥을 지을 재력이 없었습니다.

서까래로 썼으면 하는 작은 목재를 기둥으로 사용하여 허름한 집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더하여 조선시대는 성리학이 지배하는 체면 중시 사회입니다.

호화로운 주택을 짓는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한 사치로 규정합니다.

애초에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출현할 통로를 막아 버립니다.

 

절터는 아무리 토목기술이 발전했다 해도 지형을 크게 거스를 수 없기 때문에 산지사찰과 평지사찰이 확연히 구분됩니다.

산지사찰은 지형에 맞게 수많은 축대와 계단이 설치되어야 합니다.

주변 환경과의 조화는 물론 채광, 안전, 이동선까지 고려해야 하니

각 전각이 비교적 소규모로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산지사찰은 산사태나 산불 등으로 피해를 입은 뒤에 재건되지 못하고 폐사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에 비해 평지사찰은 다양한 전각 배치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소위 칠당가람 등 일정한 격식을 갖춘 전각이 지어집니다.

칠당(七堂)은 종파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불상을 봉안하는 법당과 스님의 교육과 설법이 진행되는 강당, 일상 생활공간인 승당, 식량 보관과 조리 시설인 고리(庫裏), 금강·천왕·해탈문 등 삼문(三門), 목욕 시설인 욕옥(浴屋)과 화장실인 서정(西淨)을 말합니다.

 

사찰의 전각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원리에 따라

궁궐에 준하는 둥근기둥이 허용되었습니다.

즉 궁궐과 종묘, 성균관·향교·서원·사당 등의 제향시설과 동급으로 대우를 받아 둥근 기둥을 세우고

붉은 칠로 마무리를 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관청과 민가에서는 둥근 기둥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불전의 명칭도 대궐 전(殿)’자를 사용하고 위계에 따라 각(), (), (), (), (), ()을 사용합니다.

즉 궁궐에 버금가는 성스러운 공간으로 예외를 인정받았습니다.

이러한 한반도 건축의 기초를 바탕으로 사찰을 탐방하면 됩니다.

(부석사 조사당 건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