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천사가 거돈사와 같은 부론면에 있다기에 바로 옆 동네인 것으로 알았다.
근데 아니다... 같은 면에 속하기는 하지만 같은 산줄기 다른 골짜기 인 것이다.
뭐 그렇다구 같은 조계산 아래 순천 송광사에서 선암사 가는 길만은 아니지만......
거돈사를 나와 한 참을 돌아 원주군 부론면 법천리에 있는 법천사지에 달한다.
주변 사과나무에 사과가 한창 익어가고.......
폐사지를 찾는 길은 그저 한가롭기만 하다.
(강원 유형문화재 20호 당간지주)
-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소재 당간지주는 민가 쪽에 있어 지나치기 쉽다.
높이 3.9m라는데 수작이라고 평하기에는 그렇지만 상당한 규모와 위용을 자랑한다.
간대를 받치는 간공까지 잘 갖춰진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다만 당간지주가 서 있는 곳은 민가이고 주변은 너른 밭으로 되어있으며
부도탑은 산 아래 있으니 그 터가 참으로 넓고도 넓다.
- 법천사는 신라 성덕왕 24년(725년) 법고(法皐)사란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한다.
법의 연못이란 뜻이니 뜻을 그러하고,
지광국사(984-1067)가 출가하고 또한 열반을 맞이한 곳이 법천사라 하지만
법천사라는 이름을 언제 얻었는지 기록이 없다.
다만 수몽(水夢, 지광국사속명)이 법고사로 관웅대사(觀雄)를 찾을 때는 법고사다.
관웅대사를 찾은 수몽행자는 곧 해린(海麟)이라는 법호를 받아 해안사 스님이 된다.
용흥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지광국사는 21세에 대선(大禪)에 급제하여
27세에는 어느 덧 대덕스님이 되어 법천사로 돌아온다.
이후 목종,현종,덕종,정종,문종으로 이어지는 다섯 왕을 거치면서
열두 번이나 법호와 법계를 받는다.
그러나 지광국사는 숭교사(崇敎)와 현화(玄化)사 주지로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을 뿐
법천사에 머무른 흔적이 없단다.
그러나 그 열반의 마지막 흔적인 부도와 부도비를 출가본사인 법천사에 남긴다.
- 아!!! 그놈의 기록..기록..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한글창제 등등등 기록문화의 원조라고 말하지만......
문자와 기록은 백성들의 머리통을 크게하여 통치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이유로
백성들이 멍청이가 되기를 바라는 위정자들에 의해 철저히 무시된다.
금속활자를 만들면 뭐하나......... 자기네 지도층 몇몇만 보고자 하는데.......
한글창제의 서문에는 백성들을 어여삐 여겨 문자와로 사맛디 아니할.....어쩌구..
말로는 백성들을 위한 척 하지만 글자마저 독과점으로 자신들의 지위를 이어가는데
사용하려한 자들이 이 땅의 주인공인체 하는 위정자들 아니었던가??
뭐 절집에서도 신도들이 불교대학 다니는 것을 꺼려하는 스님네도 계시니 할말없지.
말이 새부렀다.
- 지광국사가 한참 법력을 떨칠즈음 법천사는 대찰의 면모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 초기에는 유방선이 법천사에 머물면서 유교를 강(講)했다 하는데
이때 배운 제자들이 유명한 한명회, 강효군, 서거정, 권람 등 이었단다.
임진왜랜때 전소된 이후 다시는 중창하지 못하였으니 폐사지의 길을 걷는다.
절터 부도비 주변에는 깨진 불두, 광배, 연화문 대석, 용머리, 기타 알 수 없는
석조 부재들이 흩어져 있다.
(법천사지 전경이다.)
- 2013. 10월 현재 법천사지는 발굴중이다.
다만 지광국사현묘탑비 주변은 1단계로 발굴이 완료된 상태로다.
뭐 2010년까지 전 부지 발굴을 완료할 계획이었지만 아직도 진행중이다.
(지광국사현묘탑비)
- 고려 선종2년(1085년)에 세워진 지광국사현묘탑비는 높이 4.55m로 국보 59호다.
11세기를 대표하는 부도비라 할 만큼 화려하고 또한 정교하다.
귀부는 당당하다 못해 위압하는 힘이 있고, 비신과 이수까지 선 하나하나는 섬세하고
이수의 조각은 화려함의 극치를 이뤄 표현하기가 그렇다.
지대석 위의 귀부 거북은 긴 목을 쭈욱 빼고 앙다문 이빨은 가지런하며,
조각된 물고기 비닐은 섬세하고 거북의 등 네모칸 마다 왕(王)자가 수 놓아져 있다.
거북의 수염도 당차다.
- 오석으로 조각된 비신은 두조각으로 깨어지고 일부 탈락된 부분도 있지만
측면의 봉황, 비천상, 나무, 당초문, 해, 달 등의 조각은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이다.
- 이수 즉 상륜부는 연꽃과 구름문, 귀꽃까지 오밀조밀하고 현란한 조각이다.
부도와 비는 지광국사 열반 18년 만인 선종 2년(1085년)에
당대의 명신 정유신이 글을 짓고 당대의 명필 안민후가 글을 썼으며
이영보와 장자춘이 새겼다 한다.
(지광국사현묘탑.... 부도)
- 부도비 옆에는 우리나라 부도중 가장 화려한 지광국사 부도가 있었으니
지광국사현묘탑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일제 때 오오사까까지 밀반출되었다가 반환되었다 하니 그 운명이 기구하다.
지광국사현묘탑[智光國師玄妙塔]은 8각 원당(圓堂)이라는 유행(기본형)에서 벗어나
평면 사각형을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기단 구조는 7층을 헤아리는 석재(石材) 각부에 조식(彫飾)이 가득 새겨져 있다.
지대석(地臺石)이 매우 넓고 층층의 높이와 넓이에 변화를 주었으며,
탑신 전후면에 문비형(門扉形)과 좌우에 페르시아풍의 격자창을 조각하고
다시 영락(瓔珞)으로 장식하였으며, 옥개(屋蓋)는 천개형(天蓋形)으로 장막을 드리우고
옥리(屋裏) 즉 집의 중앙은 불(佛)·보살·봉황 등의 조각이 아름답다.(기록 참조한 것임)
상륜부(相輪部)도 앙화(仰花)·복발(覆鉢)·보개(寶蓋)·보주(寶珠)가 층층이 올려 있다.
- 발굴중인 법천사지
- 법천사지 발굴현장은 넓다기 보다는 광활하였다.
양쪽 산 골자짜기에는 석축 등 발굴이 완료되었는데 아마도 부도전 등의 자리 같다.
금당이나 탑, 각종 전각이나 당우가 들어선 자리는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도로를 가운데로 양 옆으로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데.......
발굴유물을 전시하는 전시관 등이 관공되면 와 봐야지.
(법천사지 느티나무)
- 몸 안의 사리는 누구에겐가 내어 준 듯 속이 텅빈 느티나무는 그 세월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푸르름을 넘어 가을을 전령하고 있으니.......
아마도 지광국사스님의 가르침이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지광국사(984-1067)
원주 출신으로 속명은 원(元) 수몽(水夢)이고 법호인 해린(海麟)은 관웅스님께 받는다.
법천사 관웅스님께 수업을 받고 해안사에 따라가 준광(俊光)스님을 은사로 출가한다.
용흥사 관단(官壇)에서 구족계를 받았다는데 관단은 관에서 설치한 계단으로 보인다.
유식(唯識)을 공부하고 1001년 숭교사를 개창하여 명성을 얻을 때가 18세란다.
법상종을 이끄는 이가 되니 비문에는 천품과 그릇이 부처님께 버금갔다고 적고 있다.
21세인 1004년 대선에 급제하여 법상(法床)에 앉았는데 불자(佛子)를 휘두르니
가희 청중의 걸상이 부러진 것 같다라고 기록한다.
- 다섯 왕을 거치면서 대덕,대사,중대사,승통,강진홍도,명료돈오 등의 법호를 받는다.
문종은 해린스님을 직접 찾아 왕사(1056년), 국사(1058년)로 추대하고
후에는 국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 여섯째 아들을 그의 문하에 출가를 시키니 그가 바로 대각국사 의천이다.
국사의 나이 84세(1067년)에 수가 다하였음을 알고 법천사로 돌아와 머물다가
10월 23일 열반에 드니 문종은 시호를 지광(智光), 탑호를 현묘(玄妙)라 하고
비문을 지으라 하니 최고의 극찬과 명문장을 만들어 올린다.
고려사회를 밝게 비추던 선사의 일생이 부도와 부도비로 전하니
단순한 문화유산이 아니라 우리의 길을 밝히는 가르침인 것이다....
혜림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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