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산회상

충주의 외로운 중앙탑과 청룡사지 부도(20131001-2)

by 혜림의 혜림헌 2013. 10. 15.

 

(충주 중앙탑 공원 관리사무실 옆 부도) 

 

- 높이 솟은 당간지주와 웅장한 탑, 대웅전 등 수 많은 전각은 간데 없고

 스러진 당간지주와 주춧돌, 그리고 본래의 형체를 알 수 없는 탑 부재 등

 사라져간 절집을 보는 감회는 어찌 표현하면 좋을 것인가??

 참으로 안타까운 생각이 들지만.......

 세상은 무상하며, 무아하다.

 무상하고 무아인 이 우주를 지켜주는 법은 무엇일까?? 그건은 바로 연기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하며,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영원한 것이 없으며, 영원한 것이 없으므로 나랄 것이 없다.

 그럼에도 현상적으로 보이는 이 삼라만상의 세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연기하는 법의 세계에서 현상적으로 보이는 것은 찰나일 뿐인 것이다.

 

- 사라져간 절터에서 처연함을 느끼다가도 불법의 진리를 되새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오늘은 국보 6호 충주 중앙탑이다.

 사실 한반도의 중앙이 영월이라 하여 국토정중앙을 홍보하고 있지만

 통일신라시대에는 충주가 국토의 중앙이었다.

 그러나 중앙이라니 그 기준이 어디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남한강변에 세워진 이 7층탑은 그 동안의 세월을 바라보았건만 말이 없다.

 연기하는 세월 속에 주변은 공원으로 꾸며지고, 남한강은 오늘도 흐른다.

 

-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칠층석탑은 중앙탑이라 부른다. 

 통일신라시대에 국토의 양 끝에서 동시에 출발한 두 사람이 마주친 곳이라나???

 탑평리 칠층석탑은 통일신라 석탑가운에 유일한 칠층탑이란다.

 또한 주변보다 높은 인공의 언덕위에 서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증이 생긴다.

 탑의 정면으로는 남한강 물줄기가 유장하게 흐르고, 주변은 공원으로 단장되어 있다.

 

- 들리는 이야기로 1917년 일제시대에 붕괴의 우려가 있어 해체복원하였다 하며

 이 때 서류조각, 구리거울, 목제칠함, 은제사리함과 사리병이 있었다 하는데

 각 유물별로 통일신라, 고려 등 시대가 달라 

 통일신라시대 탑을 세우고, 고려시대에 탑을 열고 수리하여

 시리장치를 다시 봉안했음을 알 수 있단다.

 

- 현재는 탑만이 외로이 서 있지만 기와조각, 각종 석재 등이 다수 발견되어

 관리실 옆에 전시되어 있다. 

 특히 절의 창건연대와 폐사된 시기 등에 대해 전혀 기록이 없어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 모두를 창건관련 설로 전하기는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고려때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또한 폐사된 사유도 남한경변에 자리한 지리적 특성으로

 홍수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유추해 보기도 한다.

 실제 1970년대 초 홍수로 탑 근처의 민가 등이 모두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피해를

 입었으며 당시 불도저를 동원한 무식한(??) 복구로 절집의 흔적은 사라지고 만다.

 유장하게 흐르는 남한강 뱃길 따라 물자며, 뗏목을 운반하던 뱃사공과 떼꾼들이

 탑을 이정표 삼아 좌표를 잡고, 탑에 예경하면서 무사운행을 빌지 않았을까? 

 

(석등의 지대석이 아닐까 한 석 부재)

 

(관리실 옆 부도, 석등 등 부재 들)

 

 

= 흔적 없는 청룡사지를 향하다 = 

 

- 청주시 소태면 소재 청룡사터에는 위전비와 부도, 탑비, 석등이 있다.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다 보면 주차장이 나온다.

 절집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고 다만 산 초입에 이수 한쪽이 사라진 위전비가 나온다.

 위전비란 절집의 창건이나 중건과정에서

 토지 등을 희사한 분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비이다.

 귀부와 이수에는 이끼가 끼고, 비문의 내용도 알아보기 힘들지만.......  

 위전비는 숙종 18년 1692년 세워졌다.

 

- 위전비를 지나 몇 걸음 옮기면 석종형 부도와 또 다른 이의 부도로 보이는

 망가진 석조물을 볼 수 있다.

 조각솜씨 등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 청룡사는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는 알수 없지만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화창한 봄날 길가던 도승이 근처를 지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린다.

 할 수 없이 나무밑에서 비를 피하는데 용 두마리가 하늘에서 여의주를 가지고 놀다

 땅에 떨어뜨리니 여의주를 찾아 내려오던 용 한마리는 청계산 위로 올라갔고

 큰 빛을 내던 여의주는 사라지고 용도 사라진다.

 주변을 둘러보니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의 천하 길지더라.

 용의 힘이 꼬리에 있으니 그 자리에 암자를 짓고 청룡사라 했더라.

 그후 고려말 혼수(混修)국사가 말년에 머물다 조선태조 1년(1392) 입적했다.

 태조는 혼수에게 보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절을 크게 중창하니

 남한강변의 고달사, 거둔사, 법천사, 흥법사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으나

 조선말 폐찰되었다 한다.

 

- 폐사와 관련해서는 판서 민대룡이 소실의 묘를 이곳에 쓰려고 승려를 매수하여

 절을 불태웠다 하고, 불을 지르고 달아나던 승려는 벼락을 맞아 죽었다는 야그.

 지세를 살피건데 청룡사는 부도가 있는 곳에서 한 참 아래 전답부근이 아닐까??

 그러나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흔적을 찾을 수는 없다.

   

- 절집의 흔적도, 대웅전의 위치도, 불탑도 찾을 길 없으니 보각국사 부도를

 살피는 것으로 허전한 마음을 달랜다.

 보각국사는 고려 충숙왕7년(1320년)에 경기도 광주에서 조씨성으로 태어난다.

 어려서 출가하여 법명은 혼수(混修), 자는 무작(無作)이며, 법호는 환암(幻庵)이다.

 대선사 계송스님에게서 법을 받고 전적을 읽혔으며, 22세인 충혜왕 2년(1341년)에

 선선(禪選)의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했다.

 

- 여기서 범명은 스승에게서 받음이요, 자는 도반끼리 편하게 부르는 이름이다.

 법호는 스승에게서 깨달음의 징표로 받음이요, 시호는 임금이 하사한 사후이름이다. 

 선선(禪選)이라 함은 승과의 한 분야이고 상상과라 함은 장원을 이름이다.

 

(보각국사 부도)

- 석등과, 부도, 부도비가 일렬로 서 있는데 

 팔각원당형의 부도는 하대기단, 중대기단, 상대기단은  물론 몸돌과 지붕돌까지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팔각의 지대석은 홈을 파서 하대기단을 끼워넣고, 하대석 윗면은 복련을 새겼다.

 특히 꽃잎마다 삼산형(三山形)의 꽃이 장식되어 있다.

 중대석은 배가 부른 북통형태로 특이하며, 안상에는 운룡(雲龍)과 사자상을 새겼다.

 상대석은 하대석을 뒤집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모양이 같다.

 몸돌은 팔각이지만 배가 부른 북통모양이며, 각 면에는 무기를 든 신장이 지킨다. 

 모서리는 용이 휘감는 배흘림 형태의 기둥이 부조되어 있고, 기둥위에는 목조건물의

 그것처럼 창방이 표현되어 있다.

 지붕돌은 기왓골은 없으나 합각마루마다 봉황과 용이 새겨져 있고

 꼭대기는 일곱장 연잎 위에 앙화, 복발, 화염보주가 차례로 얹어있다.

 상륜부가 묻힐 정도로 쓰러져 있던 것을 1968년 제자리에 복원했다 한다.

 당연히 사리, 옥촛대, 금망아지, 금잔 등의 사리와 장엄구는 사라졌다. 

 

(보각국사 부도 앞 사자 사각석등)

- 보각국사의 부도를 밝히고 또 한편으로 보각국사의 명복을 비는 장명등이다.

 조선 초기 부도, 부도비, 글구 석등은 일렬로 배치되었다.

 하대석을 사자상이 대신하고 간주석은 사각, 상대석은 앙련장식, 화사석은 앞뒤로만

 열려있지만 역시 사각이며, 지붕돌은 연잎 네개를 엎어놓은 듯 하다.

 지대석, 하대석, 간주석, 상대석, 화사석, 지붕돌 모두 한 개의 돌이다.

 화사석은 앞 뒤로만 화창이 뚫려있고, 지붕돌은 방석 같기도 하고, 부푼 빵 같기도...

 석등은 보물 제 656호이다.

 

(보각국사 부도비이다)

- 부도비의 내용인 즉 

 보각국사는 고려 충숙왕7년(1320년)에 경기도 광주에서 조씨성으로 났으며,

 어려서 출가하여 법명은 혼수(混修), 자는 무작(無作)이며, 법호는 환암(幻庵)이다.

 대선사 계송스님에게서 법을 받고 전적을 읽혔으며, 22세인 충혜왕 2년(1341년)에

 선선(禪選)의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했다.

 

- 충목왕 4년(1348년) 금강산에 들어가 정진하니 공부가 나날이 진보하였으며

 공민왕 19년(1370년) 양주회암사에서

 나옹스님을 모시고 공부를 점검하는 공부선(功夫選)을 베풀었을 때

 혼수선사는 최고의 성적을 받아 요직을 권하였으나 응하지 않고

 공민왕에게 법을 가르쳤더라.

- 우왕 9년(1398년) 국사가 되었으,며, 조선 태조1년(1392년) 청룡사에서 입적한다.   

 태조 이성계는 그의 덕과 지혜를 기려 보각(普覺)을 시호로,

 정혜원융(定慧圓融)을 부도명으로 하사하니 왕명으로 부도와 비를 세운 것이다.

 비문은 권근이, 글씨는 승려 천택이 썼다.

 

- 고려말 조선초 나라의 운명이 엇갈리는 시절 두 나라의 임금으로 부터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었으니 국사의 경지를 짐작할 만 하다.

 

              혜림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