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쪽 가까운 곳에 세월의 때가 묻어있는 석축과 느티나무가 보인다.
석축을 오르면 지금은 사라진 절.... 그러나 남한강 따라 번성하던 거돈사가 있다.
- 단양, 제천, 충주를 휘감아 흐르던 남한강이 풍요를 더한 곳이 바로 원주 문막이다.
한반도의 등줄기 백두대간의 일부가 한 자락 걸친 곳!! 강원도 원주!
원주는 대관령을 넘어 한양을 넘나드는 길목인가 하면, 충청도의 도강길이기도 하다.
현재는 중앙선 철도와 영동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 등으로 사통팔달의 요지이지만
사실 그 옛날 그 시절에는 남한강 줄기에서 형성된 문막평야가 삶을 넉넉하게 하고
반면 군사적 요충지로서 어느 한 때 편할 날이 없었던 고난의 땅이기도 하다.
그런고로 나말여초 남한강을 끼고 수많은 절들이 세워졌고 또한 사라진다.
- 번성했던 절 그 중심에 거돈사와 법천사가 있다.
원주 부론면 정산리 입구에서 작은 다리가 놓인 내(川)를 건너면 거돈사다.
- 신라말은 변혁기다.
화엄종 등 왕실의 안녕을 빌면서 그들의 이해를 대변했던 불교가 평등을 들고 나온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이 어마어마한 평등사상이 선종이다.
화엄종에 기반하는 교학중심의 불교는 귀족의 것이요, 조직화된 왕실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 세상은 귀족과 왕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민초들이 있었던 것이다.
백성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권력투쟁을 일삼는 왕실과 귀족사회 등 중앙의 분열은
민초들의 불만을 해소하지 못했고 당나라에 유학했던 학승들은 지방을 맴돈다.
이 땅에 선불교를 들여온 도의선사도 당대에 제 뜻을 펴지 못하였지만
지방으로 눈을 돌리니(사실은 은둔) 지방 즉 변방세력이 힘을 얻게 된다.
단순히 지방을 맴도는 것이 아니라 지방 유력인사와 교분이 늘고 후원도 늘어난다.
즉 신라말 들어 구산선문이 개창되니 바야흐로 선종의 시대요, 지방시대가 열린다.
서라벌 지금의 경주를 중심으로 지어지던 사찰이 전국으로 퍼져나간다.
그중에도 남한강변은 물산 즉 돈이 모이는 곳이다.
고려초까지 남한강을 중심으로 수많은 절집이 지어진 것이다.
(거돈사지 전경)
야트막한 산을 뒤로하고 있는 거돈사지에는 현재 원공국사승묘탑비와 삼층석탑 1기,
각각의 전각이 세워져있어야 할 터에는 발굴의 흔적만이 남아 있다.
특히 원공국사부도는 모형이 제작되어 있다.
절터는 한림대학교 박물관 책임 하에 20년 전쯤 네차례에 걸쳐 발굴하여
전각이나 당우의 위치는 잘 드러나 있다.
절 남단은 높은 석축을 쌓아 터를 만들고, 가운데에 금당을 두었다.
금당 앞에는 삼층석탑을 모셨으며, 금당을 중심으로 회랑을
뒤편으로 이어지는 층계별 단을 만들어 당우를 배치하였다.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 하는 전문이 있으나 기록은 없단다.
추측컨데 임진,정유년 왜란때 소실되었던 것은 맞은 것 같구,
경제적 또는 정치적 여건상 재건이 이뤄지지 않아 끝내는 사라진 절이 된이다.
- 원공국사 탑비이다.
천태학스님이셨던 원공국사가(930-1018) 이곳 거돈사에서 열반을 맞이한 인연으로
현종 16년(1025년)탑비를 모시게 된 것이다.
원공국사의 호는 지종(智宗)이며, 속성은 전주 이씨라 한다.
여덟살의 나이에 인도승 홍범삼장의 가르침을 받아 954년 승과에 합격하고
중국 오월(吳越)에 유학하여 법안종 영명사 연수선사의 법맥을 잇는다.
970년 귀국하니 광종이 환대하고 重大師, 三重大師의 법계를 받았으며,
성종시대 5년동안 궁중에서 설법하고, 현종은 대선사와 왕사의 법계를 내린다.
현종9년(1018년)거돈사로 돌아와 4월 17일 열반에 드니 세수 89, 법랍 72년이다.
열반시 "여래께서 당부하셨듯이 불법교화가 단절됨이 없도록 할 것이며,
부음을 임금께 전하여 국가의 의전규정을 어렵게 말라"는 당부를 남긴다.
현종은 국사로 추증하고 시호를 원공, 탑호를 승묘라 하여 부도를 세운다.
일제시대 부도는 일본인 와다라는 작자가 서울의 자기집으로 옮겼으나
해방 후 회수하여 1948년에 경복궁으로 옮겼다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 비신은 2.45M, 폭 1.26M로 고려 비석양식의 시원이라 할만 하단다.
조금은 가는 듯한 비신에 비해 귀부와 이수는 웅장하여 비례는 거시기하다.
거북의 등은 겹으로 정육각형으로 새기고 그 안에 불(佛)자와 만(卍)자, 연꽃문양을
교대로 새겨놓았다.
움츠린 목에 꽉 다문 입의 귀부는 귀엽기까지 하다.
이수는 구름속에 노니는 용이 사실적이다.
비문은 최충이 지었으며, 김거웅이 전액을 쓰고
각은 승려 정원, 계상, 혜명, 득래, 혜보 등 여러사람이 했다고 적혀있고 보물 78호다.
마을 주민들은 다른 곳에 있던 비석을 옮겨왔다고 증언 한다.
- 다만 박물관으로 가신 부도를 아쉬워한 자치단체의 노력으로
2007년 거돈사지 전망좋은 위치(당초 자리)에 모형 부도를 세웠다.
(중앙박물관에 있는 원공국사 부도)
- 이 외에도 거돈사지에 온전하게 남아있는 유물로 삼층석탑이 있다.
사실 이 탑이 맨 먼저 눈에 들어오지만 나중에야 적는다.
금당터로 추정되는 곳에 거대한 좌대가 있고 그 앞에 탑이 있다.
폐사지의 쓸쓸함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가 하면 더해주기도 하는 탑이다.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생각된다.
3단의 장대석으로 나지막한 토단을 만들고 그 위에 3층의 기단을 받쳤다.
상대기단은 우주가 조각되어 있다.
탑신의 각 층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한개의 돌로 구성하였으며,
지붕돌 모서리에는 삿됨을 경계하는 소리를 내라는 풍탁을 매단 자국이 있고
탑 앞에는 연꼴으로 장식된 배례석이 있다.
높이는 5.40M라 하며 보물 750호로 지정되어있다.
- 탑 뒤로 장대석과 석축으로 장식된 높은 단 모양의 금당터가 있다.
금당 터 가운데에는 석조좌대가 있다.
그러나 훼손이 심하여 무얼 말하는 지 알 수가 없다.
- 거돈사지 답사 길에 한 무리의 답사꾼들이 버스를 빌어 남한강변 폐사지를 살핀다.
법천사지와 고달사지에서 연이어 만난 이들 답사꾼들의 절반은
터 옆 밤나무 아래서 밤 줍기에 열중이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사진촬영과 간단한 설명에 매달려
폐사지의 분위기와 기운을 살피는데 소홀한 감이 있다.
쓸쓸함 속에 쓸쓸하지 아니함을 전하는 폐사지........
폐사지를 알게되어 참으로 복이다.
혜림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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