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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회상

여주 고달사지

by 혜림의 혜림헌 2013. 10. 30.

 

- 폐사지를 찾아다니는 발걸음도 바쁘지만 글이랍시고 기록을 남기는 것도 바쁘다.

 조금은 한적한 시골길 지나 너른 터가 나오고 쉼터 같은 느티나무 아래 차가 쉰다.

 경기도 여주시 소재 고달사지다. 

 고달사지가 아닌 걍 고달사였으면 좋으련만.......  

 물론 절터 위에 쪼그라진 고달사가 있다.

 

- 혜목산 고달사란다.

 물론 그 옛날 영화를 자랑하던 고달사는 황량하기까지 한 너른 터와

 부처님을 모셨던 좌대, 비신을 잃어버린 귀부와 그에게 몸을 의탁한 이수,

 두 기의 부도, 글구 석조, 그 외 형체를 알 수 없는 돌덩이들 만이 자리를 지킨다.

 

- 고려의 문사 길재(1353-1419)는 개성을 지나면서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라고 읊었다.

 길재는 판중추부사까지 지냈지만 고려조를 지키지는 못했던 고려의 충신이다.

 

- 어찌할 것인가??

 도도히 흐르는 한강의 물결은 같은 강물인 듯 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물이다.

 끊임 없이 흘러나오는 한강의 뒷 물결은 앞 물결을 밀어낸다. 그것이 흐름이다.

 

- 고달(高達)이란 도의 경지를 통달한다는 뜻이다.

 신라 경덕왕23년(764년)에 창건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나 기록이 없다.

 실증사학 측면에서는 통일신라시대 기왓장이라도 발견이 된다면 좋으련만.......

 

- 고달사의 전성기인 고려조에는 사방 30리가 모두 절 땅이었고

 수백명의 스님이 절집을 지켰다 하지만 다 옛날 이야기다.

 향화(불)가 사그라진 절은 잊혀진 절터일 뿐이다.

 절터 안쪽에는 과거의 영화를 꿈꾸는 신고달사가 작은 몸을 누이고 있다.

 

- 현재의 고달사는 발굴이 완료되어 너른 들판을 연상시킨다. 

 

 (고달사터 전경)

 

- 고달사지를 대표하는 석조물로 원종대사탑비가 있다.

 뭐 엄밀히 말하면 비신이 사라진 귀부와 이수만 있지만 말이다.

- 아 이럴땐 뭐라 표현해야 맞을까??

 문재가 둔재임을 탄할 뿐이다.

 우선 귀부는 용감무쌍하고 위엄이 넘친다.

 원래 하늘을 움직이는 용에게 아홉의 아들이 있었다 한다.

 기중 비희라는 녀석은 무거운 것을 잘 짊어지고 있기에 비석 받침으로 쓴다.

 바로 거북이라 불리는 귀부의 용이 고녀석인 것이다.

 (이문은 먼 곳을 바라보아 용마루에, 포뢰는 소리를 잘 질러 범종에,

  공하는 물을 좋아해 다리에, 산예는 불을 좋아해 향로에, 초도는 문을 잘 지켜 문에)

- 거북은 지상과 하늘을 연결하는 고리이며 천년을 사는 장수의 상징이고

 아무기는 하늘을 나는 용의 모습이니 이 둘이 합심하여 비신을 받치는 귀부( 龜趺)

 비신을 장식하는 이수(首)가 되어 비신을 장엄하는 거다.

 기록가들에 의하면 원종대사비의 귀부와 이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며

 태산 같은 힘이 분출되고 있다는 말로 그 모양을 묘사한다.

 

- 가까이서 보니 입은 여의주를 물지 않았지만 앙 다문 그것이며,

 코는 콧등에 주름이 질 정도로 벌름거리고, 눈은 부릅떠 있다.

 그러나 이를 합해 보면 묘한 웃음이 느껴지니 우리나라 장인들의 솜씨를 찬한다.

 거북의 등가죽은 물론 움켜진 발톱에서도 힘이 느껴지고 말아내린 꼬리도 앙증이다.

- 직사각형처럼 보이는 이수는 두마리의 용이 뒤엉켜 사실감을 더하고 있고

 중앙의 제액(전액이라고도)에는 慧目山 高達禪院 國師 元宗大師止碑라 쓰여있다.

 비신이 없어 아쉽지만 더 이상의 표현은 사진으로 대신한다.

 

(고달사지 석조)

- 석조(石槽)는 말 그대로 물을 받는 저수조다.

 근데 장식이랑 가까이 보면 감탄사가 나오니 관찰해 보시길.......

 

(석조대좌) 보물 8호

- 부처님께서 앉아계시던 자리다.

 불상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으니 대좌의 모습이나,

 시대상으로 볼 때 철불이 안치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을 한다.

 지대석위에 받침돌을 놓아 턱을 이루고 그 위에 하대석은 안상과 복련으로 장식되고

 중대석은 우주를 새긴 후에 커다란 앙련을 새겨 시원그런 느낌이다.

 상대석은 앙련으로 장식하여 상대석과 하대석을 바꿔 놓아도 좋을 만큼이다.

 

(고달사지 부도) 국보

- 고달사지에는 두 기의 부도가 있다.

 산 언덕을 조금 올라가면 볼 수 있는 부도가 바로 국보 4호인 본 부도다.

 다만 주인장이 뉘신지 기록은 없구 짐작만 한단다.

 넘 화려한 부도를 설명할 길이 없어 다음 백과사전의 기록으로 대신한다.

 (국보 제4호. 높이 340cm. 8각원당형의 기본구조를 따른 승탑으로

 상륜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의 보존이 양호하며 거작에 속한다.

 여러 장의 판석으로 짜인 8각지대석 위에 2단의 8각 굄대가 있고,

 그 위의 하대석 각 측면에는 안상이 2개씩 나란히 새겨져 있으며

 안상 내부 중앙에는 귀꽃 모양을 하나씩 양각했다.

 하대석 윗면에는 겹으로 된 내림연꽃[伏蓮] 16잎을 조각했다.

 중대석은 정면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용두형의 거북을 중심으로

 4마리의 용과 구름무늬가 어우러져 부조되었다.

 거북의 몸체는 형식화되었으나 용머리 부분이나

 구름에 싸인 용의 몸체표현은 조각이 깊고 생동감이 있다.

 상대석은 8잎의 올림연꽃[仰蓮]으로 탑신을 받치고 있는데

 하대석의 내림연꽃에 비해 잎이 크고 두터우며 잎 끝의 반전도 힘이 있어

 중대석의 운룡조각과 조화를 이룬다.

 탑신 각 면에 모서리기둥을 모각하고 문짝 모양과 사천왕상을 얕게 돋을 새김한 것은

 당시 부도의 일반형을 따르고 있다.

 옥개석은 비교적 두껍고 서까래나 기왓골의 모각은 없다.

 지붕 윗면에는 8개의 우동(隅棟)선이 도드라져 있고 추녀 끝에 높은 귀꽃을 장식했다.

 옥개석 정상부에 내림연꽃을 둘러 상륜부와 연결시켰으며,

 현재 상륜부에는 복발과 8각의 옥개석 모양 보개석만 남아 있다.

 통일신라 말기의 승탑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전체적인 비례가 안정되고

 조각 장식이 대담한 걸작으로 고달사지에 남아 있는 원종대사혜진탑과

 형식이나 양식면에서 유사하여 같은 시기이거나 좀더 이른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원종대사혜진탑은 탑비의 내용에 의해 975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고달사지부도는 일설에는 868년(경문왕 8) 입적한

 고승 원감대사의 묘탑이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원종대사 부도)

- 사실 이런 선조들의 유물을 만나면 말문이 막힌다. 

 뭐라 주억거리기 보다는 걍 살펴보고 감탄하고 올 뿐이다. 

 

- 보물 7인 원종대사 부도도 문화재청 자료로 대신한다.

 넓은 절터 안에 많은 석조 유물들이 흩어져 있는 가운데 탑비와 함께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이 탑은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과

 지붕돌을 올린 형태로,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기단부에서 특이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기단부는 네모난 바닥돌에 연꽃잎을 돌려 새겼다. 아래받침돌은 네모난 형태이며,

 가운데받침돌 윗부분부터 8각의 평면이 보인다.

 즉 윗부분에 1줄로 8각 띠를 두르고, 밑은 아래·위로 피어오르는 구름무늬를 조각했다.

 그 사이에는 거북이가 몸을 앞으로 두고, 머리는 오른쪽을 향했으며

 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4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서 날고 있다.

 윗받침돌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탑신은 4면에는 문(門)모양이, 다른 4면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이 새겨져 있다.

 지붕은 처마가 수평이나 귀퉁이 부분에서 위로 향하였고 꽃장식이 달려 있다.

 꼭대기에는 지붕돌을 축소해 놓은 듯 한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다.
 이 탑은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면서 아래받침돌을 네모반듯하게 짰음은

 시대적인 특색이라 하겠다.

 가운데 받침돌의 조각은 가장 두드러지게 고려시대의 수법을 나타내었고,

 각 부의 조화도 우아하고 화려하다.

 기단부가 약간 비대한 듯 하지만 좋은 비례를 보여준다.

 

(그 이름을 잊어버린 들꽃 아니 씨앗)

 

(문화재는 서울로.... 고달사지 석등) 보물 2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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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절집의 많은 문화재들이 서울로 특히 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분이 상하지만... 보존을 위해 어떨 수 없다는데.......

 이 석등도 1959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했다.

 이름하여 쌍사자 석등!!!

 두마리의 사자가 하층기단을 형성하여 중대석과 상대석, 글구 화사석을 받친다.

 특히 중대석은 고복형 간주석을 닮은 듯도 하지만 특이한 것은 사실이다.

 조각이 섬세하고 사자의 웅크린 모습은 그 예가 없기에 보물로 지정된 듯 하다.

 당초 중앙박물관에서도 지붕돌은 없었다는데 근자의 사진에는 지붕돌이 있다.

 원래의 지붕돌을 찾았는지, 아니면 새로 만들어 올렸는지

 정확한 사연은 알지 못한다.

 

- 고달사지의 부도가 너무나 웅장하고, 화려하며, 섬세하기에 부도의 변천사를

 알아보았다.

 부도는 그 어원이 붓다(Buddha)에서 나왔음은 익히 아는 터.....

 그럼에도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을 부도라 하지는 않으니 뭔가 어색하기는 하다.

 분명한 것은 오늘날 스님의 사리를 모신 경우에만 부도라 하고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석조물은 탑이라 하니 걍 그에 따른다.

 다만 부도 역시 불상이나 탑과 마찬가지로 예경의 대상임에는 틀림이 없다.

 

- 부도가 만들어지게 된 경위는

 중앙집권적이고 왕실과 귀족 친화적이던 화엄종에 이어 깨달음을 추구하는 선종이

 세를 얻으면서 중생과 곧 부처가 다르지 않다는 평등사상이 널리 퍼지는 등

 조사와 선사들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그들을 존경하는 풍토속에 만들어진 것이다.

 

- 그러나 일부에서 부도전(浮屠殿)의 전자를 밭전(田)자로 해석하여

 부도밭이라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한국 부도의 시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지 부도는

 (도의선사 부도로 짐작되며 보물 439호) 그 사각의 형상이 탑이 연상될 정도로

 불탑과 닮았으며 이후 염거화상 부도(국보 104호) 등으로 이어지면서

 팔각원당형의 형식과 기와지붕 형태의 지붕돌로 그 원형이 완성된다.

 고달사지 부도는 여기에 더하여 원형의 탑신이 만들어지고, 용이 조각되며

 한층 화려해진다.

 이후 지광국사 부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화려하고 섬세한 조각의 걸작으로

 이 무렵에 부도 앞에 석등이 등장한단다.

 물론 이 때까지는 덕이 높다고 하는 특별한 스님의 부도만 조성된다. 

 그러나 고려말, 조선조에 들어 거의 모든 스님들의 부도가 조성되면서 

 수많은 수요에 맞춰 그 양식이 대폭 간소화되니

 인도탑을 본 딴 복발형이 등장하고 또 다시 석종형 부도가 등장한다.

 조선시대 석종형 부도의 대표는 아마도 여주 신륵사에 모셔진 나옹선사의

 부도가 아닐까........ 

 

- 한국의 1600년 불교는 역사이고, 문화이고, 우리 것이고, 삶이다.

 그러나 최근 100년이 안 되는 역사 속에 때로는 미신으로 천대받고,

 때로는 정치권력의 틈바구니에 끼인 신세가 되고,

 때로는 절뺏기 싸움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이제 살만해져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의 자랑스러운 전통과

 문화재들은 그 행방이 묘연하다.

 아니 파괴되고, 무너지고, 도둑에게 넘어가고, 개발의 포크레인 발톱아래 사라진다.

 그러나 늦었다 하는 지금이라도 나서야 한다.

 열심히 공부하자.... 글구 관심을 가지자...

 국보 몇 호인지?  무슨 형식인지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 것을 사랑하고 지켜내고자 하는 그 마음이 중요하지 않을까??

 

                혜림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