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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회상

미륵대원지와 사자빈신사탑(20131001)

by 혜림의 혜림헌 2013. 10. 8.

 

- 내가 있기에 절집이 있고, 절집이 있기에 절집을 간다.

 내가 없더라면???????

- 요즘 절집에서는 만년위패를 모신다는 알림을 종종 본다.

 만년위패라!!! 

 돌아가신 영가님을 위해 만년 즉 세세생생 극락왕생을 축원드린다는 이야긴인데....

 자업자득이요!! 자작자수라..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것이니.......

 과연 절집에서 하는 말인지는 의심이 가지만........

 

- 생로병사하고, 생주이멸하고, 성주괴공하는 것이 삼라만상의 이치다.

 만년위패를 모신다고 큰소리 치지만 만년의 세월이 가능한 건가??

 오직 무상할 뿐임을 그대들은 왜 모르는가?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온지 1천6백여년........

 수 많은 절집이 지어지고 또 사라져갔다.  그리고 그것을 나는 안다.

 

- 사라져간 절집 즉 폐사지를 찾는다.

 2013. 10. 1~10. 3일까지 충주, 원주, 여주, 양양의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에 있는 미륵대원지이다.

 현재는 미륵세계사라는 작은 절집이 있다.

 

- 미륵세계사로 가는 길은 계립령(지릅재) 옛길인 하늘재 가는 길 우측에 있다.

 뭐 지리하게 길 이야기를 하기는 그렇지만 충주와 문경을 연결하는 길이 바로

 계립령이고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하늘재인 것이다.

 계립령에서 송계계곡으로 향하지 않고 직진하면 바로 하늘재이지만.....

 오늘에는 차도가 아닌 탐방로라는 것이다.....

 그 오른쪽에 오늘의 목적지 미륵대원지가 있다.        

 

(미륵대원지 전경)

 

 (병영지라고도 하는 미륵대원지 왼편으로 가로수 아래 길이 하늘재이다)

 

- 하고 많은 이름중에 왜 미륵대원이라는 이름을 얻었을까??

 경상도에서 한양을 연결하는 길은 계립령 말고도 조령(새재)이 있고

 오늘날에는 이화령이 고고씽을 한다.

 물론 영주와 단양을 연결하는 죽령도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가장 먼저 열린 길이 바로 신라 여덟째 왕인 아달라왕 3년(156년)에 열린

 지릅(삼 껍질을 벗긴 겨릅의 사투리)재 즉 계립령이다.

 죽령은 2년여 뒤에 열렸다 하며, 새재라 불리는 조령은 고려시대에 열렸다 한다.

 

- 다소 완만한 길이 계립령(하늘재)이지만 사람과 문물, 군사들이 오가며

 아픈 다리를 쉬고 평안한 여행길을 빌만한 그 어떤 장소를 원했을 터......

 그 곳이 바로 미륵대원지가 아니었을까?  

 

- 문화의 핵심은 소통이다.

 소통이라 하면 점잖은 담소와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생각할 지 모르지만

 소통의 핵심은 경제 즉 먹거리이다.

 먹거리는 걍 얻는게 아니라 싸움 즉 견제와 균형 글구 전쟁을 통해 얻는다.

 그  먹거리를 사이에 두고 일어나는 권모와 술수, 협박, 무력이 함께하는 가운데

 교류가 일어나고 문화의 흐름이 생겨나는 것이다.

 

- 즉 교류가 활발했던 실코크드는 사실 문화통로가 아니라 전쟁의 통로였던 것이다.

 문화가 교류한 것이 아니라 유목민(몽골초원)과 정주민(중국)의 싸움터요,

 그들에게 필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물론 누구에게는 삶의 터전이었지만...

 지들끼리만 싸웠으면 하지만 연기하는 세상의 이치는 토착민들에게

 애꿎은 희생을 강요하여 슬픈 전설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가 길을 잃었지만.......

 

- 한반도의 우리네 조상들은 중원을 놓고 혈투를 벌이다가도 교역의 통로가 되었던

 이곳 미륵리에 절집을 짓고, 부처님을 모시고, 소원을 빌었던 것이다.

 아니 미륵부처님을 모시고 소원을 빌다보니 지명이 미륵리가 되었던 것이다.

 

 (미륵대원지 초입에 쓰로진 채 방치된 당간지주 부재들)

 

 (긴 세월 비석을 얹고 있다가 내려놓고 쉬고 있는 돌거북)

- 화려하지는 않지만 사실적인 질감을 보이고 등에는 비신을 얹었던 자국이 선명하다.

 등에는 작은 새끼거북 두마리가 있다. 그러나 사진에는 희미하여 싣지 않았다.

 

(돌거북 앞에서 바라본 미륵대원 전경) 

 

- 멀리 보이는 쪽이 남쪽이다.

 즉 미륵대원지 미륵부처님께서는 남쪽에서 북쪽 송계계곡을 바라보고 계신다.

 우선 1970년대 말 발굴이 시작되었다지만 바닥 전체가 씨멘트로 덮인 사연이

 무엇인지 궁금하고 또한 안타깝다.

 

(5층 탑 옆 사각석등)

 

- 절터에 들어서서 당간지주 잔해를 지나 5층탑 옆에 사각 석등이 있다.

 사각의 지대석 위에 복련으로 장식한 기단석은 연잎이 선명하다.

 역시 사각의 간주석은 튼실하고, 가운데 불꽃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앙련의 받침돌 역시 사각이며, 그 위에 네개의 동자주처럼 작달막한 기둥을 세워

 화사석을 대신하고 있으나 그나마 기둥돌 두개는 가운데가 부러진 것처럼 보인다.

 두툼한 지붕돌(옥개석)은 장식이 단조로우며 노반 위에 연꽃보주가 있다.

 

(주춧돌 등 널부러져 있는 건축 부재들)

 

(알기 쉽게 온달장군 공깃돌)

- 고구려 온달장군이 가지고 놀았다는 곳깃돌의 전설이 있다.

 다만 살피건데 자연석은 아니고 일부 다듬어진 모습에서 절집에서 이야기하는

 보주탑이라 봄이 타당하지 않을까??

 

(지윤 주지스님)

- 언뜻 보면 환영의 손짓 같기도 하지만 사진촬영을 사양하시는 손사래다.

 덕명불 사무장보살님, 서울보살님과 함께 차를 접대 받았다.

 

(미륵부처님 앞에 모셔진 보물 95호 5층 석탑)

- 언뜻 보아도 5층 석탑의 지대석은 자연석이다.

  학자들에 의하면 미륵대원이 조성되고 미륵부처님이 모셔진 시기는 고려초기이지만

 본 탑은 고려중기 작품이란다.

 우선 자연석을 지대석으로 이용하다보니 미륵부처님의 오른편으로 비켜 서 있다.

 또한, 자연석이다 보니 지대석의 모양도 네모난 모습에서 다소 이그러져 있다.

 탑신과 옥개석(지붕돌)은 1층 옥개석만 2매로 되어 있고

 나머지는 한 개의 돌을 다듬어 얹었다. 

 지붕돌의 낙수면은 경사가 급하고 모서리의 들림도 없다.

 상륜부는 큼지막한 노반과 반구형 복발, 찰주가 휜채로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는 상승감이 부족하고 둔중하고 투박한 느낌이 크다.

 

- 여기서도 탑을 보호하는 난간은 십자형으로 되어 있어 사무장님께 말씀드렸지만

 자체적으로 예산을 확보하여 설치하지 않는 한 딱히 방법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시나 문화재 당국에 강력 항의하여 절집의 십자가는 퇴출되어야 마땅하다.

 

(탑과 미륵부처님을 밝히는 석등)

-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길을 나서자 가난한 여인이 수중에 가진 전 재산을 털어

 살 수 있는 최대치의 기름을 사서 불을 밝히셨다.(뭐 전재산이라야 몇 푼이지만.......)

 화려하고 수많은 등불 사이에 초라하게 빛나는 빈자의 일등(一燈)은

 몰아치는 비바람 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부처님을 향해 더욱 빛을 발하였더라.

 석등은 부처님 계신 곳과 부처님 법을 밝히는 광명등이다.

 

- 석등 역시 자연석을 지대석으로 사용한 듯 하다. 

 사각의 지대석 위해 복련의 하대석을 두고, 그 위에 다소 투박한 8각의 간주석을,

 앙련을 새긴 상대석은 연잎이 선명하고 

 4면에 화창이 뚤린 화사석은 일부 깨어지고 금이 가는 등 수난의 흔적이 역력하다.

 옥개석 역시 8각이며, 위에는 8각의 받침돌을 두고 그 위에 연꽃보주를 얹었다.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아름답고 세련된 모습으로 지붕돌의 들림이 우아함을 더한다.

 

(미륵대원지 미륵부처님)

 

- 본 미륵부처님은 고려시대에 다수 조성된 형태의 입석불이다.

 충남 논산의 관촉사, 부여 대조사, 당진 안국사지 석불 등과 그 형태를 같이한다.

 즉 머리에 판석을 얹고, 옷주름이 간편소박하고 등등의 모습을 보인다.

 미륵부처님은 거대한 네개의 돌을 이어올려 불상을 조성하고 좌대와 갓을 합하면

 모두 6개의 돌을 사용하여 그 높이만도 10.6m에 이른다.

 팔각으로 된 갓모양의 판석은 모서리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 무엇을 걸었던 듯하다.

 다만 전체적인 표정이나 흰 얼굴의 미소는 덩치에 맞지 않는 펑범함 그 자체이다.

 특히 어깨가 좁고, 하체에 이르는 부분도 좁아 전체적인 균형은 다소 떨어진다.

 눈썹은 초생달처럼, 코는 다소 납작하고, 입술은 도톰하면서도 살짝 들어올려

 그 선이 또렷하지만 턱은 다소 짧고 얼굴선도 둥글면서도 네모난 모양이며

 목에는 삼도(견도, 수도, 무학도)가 아주 뚜렷하다.

 

- 근데 이 엄청난 무게의 돌을 다듬어 어떻게 쌓아올렸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기중기도, 크레인도 없었을 그 시절에 말이다. 

 또한 부처님 주변을 살펴보면 석축을 쌓아 석굴형식의 집을 만들고

 그 위에 목조건물을 지어올린 반 석굴법당이었을 것으로 추청한다.

 또한 석축 사이에 감실을 만들어 불보살상을 모셨을 것으로 추정되는 몇구의 조각이

 현재까지도 남아 있고, 목조법당을 지탱하는 주춧돌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미륵불 주변에 네모난 박석이 깔려 있는가 하면 여래좌상 등의 석조물과

 용머리, 사자상 등 다수의 유물이 있지만 정확한 용도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 미륵부처님의 하얀얼굴은 신비감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학자들 사이에는 목조건물에 큰 화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축의 튀임 현상이나, 변형이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불상의 머리부분이 너무나 깨끗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사실로 

 불두부분을 새로이 조성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고 한다.

 

- 미륵부처님의 시선은 송계계곡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도상으로 북쪽이다.

 물건팔러 다니던 장사치, 과거보러 가는 선비, 노역에 허리가 휘던 군인,

 월악의 산천경계를 유람하던 이, 아들 낳기를 바라는 양반가 새댁까지

 계립령을 오가던 이들의 미륵부처님을 향한 지극한 경배는

 미륵대원을 번성케 하였겠지만 어찌된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큰 화재나 났고

 폐허가 된 절터에는 잡초가 무성하였을 것이다.

 더불어 머루덩굴, 다래덩굴이 석축을 뒤덮어 그 흔적도 아련하였건만

 전해오는 옛 이야기에 귀를 귀울이던 한 보살이 1952년 한국동란이 끝난뒤

 지극한 신심으로 무성한 다래덩굴을 걷어낸 후 그 옆에 초라한 움막을 짓고

 조석예불을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때의 신심이 바탕이 되어 1970년대 발굴이 이뤄졌으며, 그 때 그 초막자리에는

 아담한 절집 미륵세계사가 들어서서 오가는 이의 이정표가 되고 있다.      

 

(부처님의 뒷모습)

- 부처님의 뒷 모습이 궁금하다.

 석축 옆을 지나 부처님 뒤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무성하게 자란 풀이 우거져 있고,

 혹여 독을 품은 뱀들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라 더욱 그렇다.

 조심스레 풀숲을 헤치고 다가가서 주위를 살피고 셔터를 누른다.

 그러나 웬지 불경한 행동이 아닌가 하여........

 멀리 북쪽으로 송계계곡을 둘러싼 월악의 줄기가 기운차고

 부처님 후면은 선명한 나발과 판석 등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기도객의 눈치가 보여 내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하늘재 옆길 병영지)   

- 미륵대원지 바로 옆에는 너른 발굴터가 있다.

 이름하여 병영지 즉 군사 주둔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곳이다.

 옆길을 따라 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오른쪽은 대광사가 있고

 직전에 3층석탑이 왜 그자리에 있는가를 설명하지 않은채 외로이 서 있다.

 전형적인 신라탑을 계승한 고려 탑 양식의 3층 석탑이다.

 왼쪽이 바로 하늘재 가는 길이다.   

 

 

= 사자빈신사지를 찾다 =

(사자빈신사지 탑)

- 사자빈신사지는 미륵대원에서 약 7키로 정도 거리 송계계곡 옆에 있다.

 월악산 맑은 물이 송계계곡을 거쳐 충주호로 흘러든다.

 물 좋고, 바위 좋고, 경치좋다는 송계계곡을 따라 가다보면 왼편으로 길이 있고

 조금가면 고려시대 석탑 한기가 있는데 바로 사자빈신사지 사사자석탑이다.

 

- 사자빈신(獅子頻迅)이란 무엇인가??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 구법여행을 다닌다.

 25번째로 만난 분이 바로 일광동산 가능가 숲의 사자빈신 비구니다.

 사자빈신 비구니로부터 법을 전해듣고 깨달음의 깊이를 더한 것이다.
 선재동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선재동자가 사자빈신비구니를 찾는 마음으로

 송계계곡을 지나 월악산 아래 사자빈신사지 석탑을 찾는다.

 사자빈신비구니가 머물던 가능가 숲의 일광동산처럼 절터가 아늑하다.

 머리에 탑을 이고 있는 네 마리 사자는 가능가 숲에 있던 사자좌이고

 안에 앉아계신 비로자나불은 사자빈신비구니의 법문이 아닐런가?

 

- 사자빈신사가 언제 창건되었고, 언제 사지만 남기게 되었는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탑은 고려 현종 때 조성되었으며 전체적으로 구층탑이었다는 명문이 있으나

 그 이상의 기록은 없다는 것이다.

 

(비로자나불과 사사자)

 탑은 현재 4층까지만 있고 5층부터는 부재조차 찾을 길이 없단다.

 전체적인 모습을 보니 지대석은 세조각으로 이뤄진듯 하지만 미처 살피지 못했다.

 지대석 위 하층기단은 네모난 통돌로  탑신석과 지붕돌 모두 한 조각으로 되어 있다.

 하대석의 안상이 인상 깊고, 기둥은 흉내만 내었다.

 상층기단 위에는 서로 다른 모습의 네 마리 사자각 각자의 방향을 응시하고 있다.

 사사자탑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바로 네 마리 사자인듯 싶다.

 사자 가운데에는 두건을 쓰고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이러한 사사자탑은 신라말에 화엄사 등에 유행하였으나 본 석탑은 고려중기인 

 1022년에 세워졌으며 몹쓸 적들이 물러갈 것을 기원하는 명문이 있다.

 보물 제 94호라 한다.

 

(절터 옆 개인주택에 세워진 탑이다) 

- 전체적으로 비례가 맞지 않고 왜소한 느낌이 들지만 차치하고.......

 충주 탑평리로 발길을 재촉한다.

 이번 폐사지 답사길에는 나의 동반자 여여안이 함께하였고,

 특히 미륵세계사에는 인연있는 덕명불보살님이 사무장으로 계시니 한결 좋았다.

 인연따라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야 늘상 있는 일이지만.......  

 부처님의 자비를 느끼기도 전에 사진만 찍기에 바쁜 내모습을 탄하고.......

 부처님을 찾는 여행길이 되기를 빌어보지만, 이번 길도 사진여행이 되지 않을까??

 

- 그러나 부처님과 선사들의 흔적을 찾는 폐사지 여행공덕으로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하기를.......

 

         혜림 합장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