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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

11. 대웅전인가? 대웅보전인가?

by 혜림의 혜림헌 2024. 2. 21.

종교는 교조와 교리, 신도의 3요소가 있어야 성립 됩니다.

물론 힌두교처럼 교조와 교리가 불분명한 종교도 없지 않지만!

일본학자들이 ‘religion’종교라고 번역했는데 이유는 모릅니다.

다만 종교(宗敎)를 뜻하는 단어의 의미는 동서양이 다릅니다.

동양에서의 宗敎위 없는 가르침으로 인간성 교육이 강조되는데 반해 서양의 religion수렁에 빠진 자를 구원하는 의미입니다.

 

우주와 자연의 창조자가 없음은 이미 증명되고 있다고 봅니다.

우주의 생성이 소립자가 수소로, 다시 헬륨으로 융합되는 대폭발의 결과라 확인되고, 발달한 유전자 기술로 새로운 종자를 탄생시키니 창조설과 각종 신()들이 힘을 잃을 법도 한데 현실은 다릅니다.

특히, 현실의 종교는 신에게의 절대 복종을 전제로 세속적인 부와 명예,’ 그리고 사후 천국을 약속하면서 우리의 욕망을 자극합니다.(신 인지 신을 앞세우는 종교 지도자인지?)

어떤 종교 지도자가 이를 보장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불교는 싯달타가 2600여년 전 깊은 수행을 통하여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제(네 가지 진리)를 깨달은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사제는 사성제(四聖諦)의 줄임말입니다.

세상은 자체로서 고통이니 고제(苦諦), 고통의 발생은 집착이니 고집제(苦集諦), 고통은 필히 멸할 수 있으니 고멸제(苦滅諦),

집착을 없애는 방법은 팔정도이니 고멸도제(苦滅道諦)라 합니다.

대웅전은 깨달음을 얻어 사바세계의 교주가 되신 석가모니부처님을 주불로 모시는 전각이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찰에서 볼 수 있으며, 사찰의 중심적 위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하는 형태가 일반적이지만, 상수 제자인 가섭과 부처님 법을 듣고 기억하여 전해준 아난존자를 봉안하기도 합니다.

보살보다 격이 높은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 또는 삼세불(三世佛)인 연등불과 미륵불을 협시불로 봉안 할 경우에는 격을 높여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는 편액을 걸기도 합니다.

 

삼세불(三世佛)은 석가모니불 이전의 과거불로 제화갈라보살이라 불리는 연등불, 현세불인 석가모니불과 미래에 성불하여 부처가 될미륵불을 말하는데 각각 과거와 현재, 미래 부처님을 상징합니다.

 

대웅전 또는 대웅보전의 명칭이 앞의 설명처럼 항상 일치하지는 않지만, 시대적 상황이나 봉안책임자 또는 대시주자의 의중이 반영되는 경우가 많다고 보면 됩니다.

 

대웅전에서 부처님이 앉아 있는 단을 수미단이라고 합니다.

이는 우주의 중심인 수미산 정상에 마련된 대좌에 부처님이 앉아서 자비와 지혜의 빛으로 중생들을 제도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대웅전의 내부구조는 상단(불단), 중단(신중단), 하단(영단)으로 구성되는데 상단에는 당연히 주불인 석가모니부처님이 모셔집니다.

신중단은 부처님 왼쪽에, 영단은 오른쪽에 배치됩니다.

좌우는 배례자의 입장이 아닌 부처님의 시선을 중심으로 합니다.

상단에는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는 장면이 그려진 영산회상도가 봉안되고, 중단은 신중탱화, 영단에는 지장탱화 또는 감로탱화가 모셔집니다.

 

천장은 우물 정()자 모양으로 짜 맞추고 보상화문이나 연화문, 화불 등의 화려한 단청으로 장식하여 천우보화(天雨寶花)의 연화장세계를 나타내고 있으니 이를 우물천장이라고 합니다.

물론 서까래가 훤히 드러나는 단순한 연등천장도 볼 수 있습니다.

산개 또는 보개로 불리는 닫집은 섬세한 솜씨로 목조조각의 진수를 보여주는데 연꽃,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 천의를 휘날리며 악기를 연주하는 천신, 가릉빈가 등을 조각하여 성스러움을 더합니다.

 

대웅전은 주불전으로서 중요한 예불이 행해지는 장소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을 안치하는 불단 외에도 향로와 촛대, 소통, 원패, 다기, 공양기 등의 불구(佛具)와 사자좌, 경상이 갖춰져 있습니다.

 

세속의 영웅들은 대부분 폭력, 무력, 권력, 금력으로 많은 살상을 저지르고 공포심을 조성하여 권좌에 올랐습니다.

참 영웅이신 석가모니부처님은 위대한 법력으로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기 전에 자기 자신의 마음을 먼저 항복 받았습니다.

이후에도 45년 동안이나, 오직 진리의 힘으로 중생들을 제도하는데 온 힘을 다 하셨으니 대웅전에 경배드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근데 법당을 관리하는 보살님은 왜 그렇게 화가 나 있을까요?

법당을 비롯한 사찰의 많은 성보들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한편으로 자랑스럽지만 불교의 현실 만큼이나 모두가 신성시하기엔 너무나 낯선 문화유산이 되어 일반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관광객들은 당연히 종교예절이나 성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합니다.

반면 법당보살님은 오직 성보 위호에 온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관광객들이 사찰의 성보나 문화재에 범하는 무례가 상상을 초월하고 종교의식의 엄숙성을 침해하는 경우도 빈번합니다.

법당보살과 관광객 사이에 너무나 먼 간극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찰예절을 모르거나, 알고도 지키지 않는 관광객들을 말리거나 주의를 주는 일을 고매하신 스님이 할 수도 없습니다.

억울해도 어쩌겠습니까? 법당보살님이 총대를 맬 수밖에.....

오늘도 법당보살은 사진 찍지 마세요!’ ‘기도를 방해하지 마세요!’

부처님께 손가락질하지 마세요!’를 외치는 마세요 보살이 됩니다.

 

단하 천연선사(739-824)는 목불(木佛)을 태워 추위를 피합니다.

불상을 태웠다고 나무라자 재를 뒤적여 사리를 찾겠다고 나섭니다.

불자들의 불상을 향한 존경심을 가벼이 여긴다면 잘못된 일입니다.

다만 현실에서 사찰을 공개하고 문화재 관람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불자들은 관광객의 호기심을 인정하고 관광객들은 불자들의 기도와 수행을 방해하지 않는 지혜로운 공존을 모색해야 합니다.

성보를 훼손하거나, 기도를 방해하지 않는 시간이라면 사진 촬영과 법당 내 문화재 해설도 보다 자유롭게 허용해야 합니다.

마세요 보살!’이 아닌 자비의 법당보살로 인정받기를 기원합니다.

(법주사 대웅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