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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

전탑을 찾아서 2(영양 현2동과 봉감모전오층석탑 20141005)

by 혜림의 혜림헌 2014. 10. 24.

 

- 인간은 보통 현세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혁신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새로운 종교가 유행하는 가 하면 새로운 나라가 세워지기도.......

 하지만 역사발전은 혁명적인 것 같으면서도 점진적임을 알 수 있다.

 세상이 뒤집어 질 만한 발명이나 사건도 그 당시에 미치는 영향은 의외로 미미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에 그 흐름을 되짚어 보면서 그제서야 아! 그렇구나 하곤 한다.

  

- 불교는 어렵다고 한다.

 공을 이야기 하면 머리부터 지끈지끈 한다는 이들이 많다.

 그 어려운 불교를 알기 쉽게 정리한다고 내놓은 것이 소위 말하는 8만4천 법문이다.

 알기 쉽게 한다고 해 놓구선 84,000법문을 내 놓았으니 불교가 어렵다고 하는 것은 당근이다.

 부처님께서는 무상과 무아를 말씀하시고 연기 즉 인연법을 말씀하셨다.

 · 무상이란 항상하지 않음이니 즉 영원성의 부정이요,

 · 무아란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이니 자아의 부정이기도 하다.

 · 그럼에도 내가 있고, 그대가 있고 삼라만상이 있는데 이 모두가 공하다고 하니 어찌 믿겠는가?

 · 믿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 화엄, 아함, 중론, 유식, 반야, 여래장, 법화, 공을 들어 설명하려는 거다.

 · 근데 그 설명이 더 어렵게 느껴졌으니 이를 아이러니라고 할까?

 

- 뭐 공에 관한 야그를 할려고 한 것은 아니구......

 경북지방의 전탑(모전석탑)을 살펴보면서 과연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리인 것을 다시금 생각한다.

 천년전 중생들의 신심을 북돋우면서 가르침을 전하였을 절집은 사라지고 탑 한기만 덩그러니 하니

 이 어찌 무상의 진리가 아니겠는가? 무아의 진리가 아니겠는가?

 벽돌을 굽고 돌을 다듬어 전탑(모전석탑)을 쌓던 장인은 물론 시주자 역시

 절집이 사라지고 탑이 무너질 것을 예상하면서 공을 들이지는 않았을 터이니 말이다.

 

- 절집마다 기도를 하면 이적이 일어날 듯 설파하여 각종 기도비를 받아 챙기구

 만년위패를 모신단다. 인등을 켜서 안녕을 빈단다. 입시기도를 한단다.

 윤달에는 삼사순례를 한다고 하고, 삼재부적을 판다.

 말로는 점을 보지 않고 상담을 한다고 하는데 나오는 말은 점집에서 나오는 말이다.

 절집은 물론 교계 신문들도 점집에서나 시도할 만한 일들을 꺼리낌 없이 광고한다.

 그러면서두 정법이 어떻구 하니 그저 웃을 밖에.......  

 그러다가도 불리하면 방편설을 꺼내든다.

 애고 말이나 못하면.......

 

- 안동에서 영양으로 향한다.

 영양은 경북 북부지역의 오지로 알려졌지만 대한민국 어디든 하루면 도달한다.

 현2동 모전오층석탑을 찾아서.......

 정확히는 영양군 영양읍 현2동이다.

 

- 개울을 지나 작은 언덕에 오르니 장대한 모전석탑이 나타난다.

 근데 기단부가 낯설은 새하얀 화강암이다.

 원래 보이던 기단은 커다란 암반이었단다.    

 1980년 해체복원하면서 너비 6.5미터, 높이 80센티의 화강암 기단을 만들기 전까진 말이다.

 

 

- 12단의 돌을 쌓아 조성한 탑 1층에는 감실이 있다.

 장대석으로 문설주를 달고 다시 목재로 문틀과 문을 달았다.

 특히 좌우 문설주에는 당초문이 조각되어 있는데 상당한 기교를 가진 섬세함이 돋보인다.

 안에는 부처님 한 분이 모셔져 있는데 원래부터 인지는 알 수 없고.......

 탑의 전체적인 모습은 비례가 정연하여 장중함과 상승감 등을 느낄 수 있다.

 몸돌의 단수도 1층 12단, 2층 7단, 3층 6단, 4-5층 5단으로 줄었는데

 4층과 5층이 5단으로 같은 것은 시각적인 고려에 의해서라는 설명이다.

 즉 5층을 3단이나 4단으로 했을 경우 시각적으로 너무 작아보인다는 것이다.

 근데 탑을 구성하는 돌들을 보면 다듬은 돌이 주를 이루지만 자연석도 가끔 눈에 띈다.

 

- 탑 옆 대웅전 처마의 낙수물 자리에는 탑의 부재로 보이는 돌이 있다.

 어찌되었던 기단부의 화강석과 보주 등이 세월의 때를 입지 않아 전체적으로는 낯선 느낌이다.

 언제쯤 장중하고, 상승감이 느껴지고, 고졸한 맛까지 더해질 지.......

 

- 대웅전 옆 작은 산신각이 보인다.

 아울러 주변에는 비석과 석조물 등이 보이지만.......

 

- 현2동을 나와 봉감 모전 오층탑을 향한다.

 근데 중간에 표지판이 잘 못 설치되어 헛걸음을 10여분이나 했다.

 큰길에서 농로를 따라가다 작은 마을을 지나면 동산천이라는 강변에 대단한 모습의 봉감탑이 있다.

 정확한 위치는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 봉감동이다.

 들판에 그것두 강을 끼고 서 있는 봉감모전오층석탑은 일단 주변을 압도한다.

 전체 높이가 사라진 상륜부를 제외하고도 11미터에 이르니 그럴 밖에.......

 

- 하층기단 즉 지대석을 3층으루 쌓구 그 위에 다시 2단의 기단석을 배치했다.

 탑신은 벽돌처럼 다듬은 수성암으로 열심히 다듬었다고는 하나 고르지만은 않다.

 남쪽방향에 감실을 만들었는데 문기둥과 이맛돌은 튼실하다.

 더우기 천왕문(天王門) 사대보살가(四大菩薩家)라는 글씨까지 새겨져 있다.

 근데 나중에 새겨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마도 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안에 부처님을 모시지 않았을까??

 현재는 감실 안에 항아리만 덩그라니다.

 국보 187호다.

 

- 좀 더 세심히 살펴보자

 1층 지붕돌의 층급 받침은 8단이다!

 2층은 7단, 3층은 6단, 4-5층은 5단이다.

 2층부터는 특이하게 층 중간에 턱을 두었는데 이것은 고려조 탑의 시대적 특징이란다.

 전체적으로 체감이 정연하고 비례가 맞아 당당하고, 상승감이 있고, 고졸함도 있으니 과히 국보다.

1990년 해체수리할 때 상륜부 목심 주초석을 발견하였구 사리구도 역시였단다.

 근데 현실은 절집은 사라지고 들판 한 가운데 당당하나 다소 쓸쓸하게 서 있다.

 

- 절집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조선시대 권세 높던 양반가의 사랑채 짓는데 목재가 사용되었을까?

 아니면 화마로 사라졌을까??

 뭐한 기록이 없어 걍 생각만 해 볼 뿐이다.

- 사진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탑 옆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이다.

 감을 수확하는 부자는 탑을 보면서 어떤 감흥이었을까??

 부질없는 생각을 하면서 차를 돌린다.

 

                  혜림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