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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

전탑을 찾아서1(안동 20141006)

by 혜림의 혜림헌 2014. 10. 20.

 

- 고성 건봉사를 출발하여(10월 6일) 안동으로 향했다.

 전탑 또는 모전석탑 하면 안동, 의성, 영양, 칠곡, 여주 등을 빼놓을 수 없다.

 아 우선 전탑을 말해야 순서일 듯.......

 전탑(塼塔)이란 벽돌 전과 탑 탑자를 쓰니 벽돌로 쌓은 탑을 말한다.

 전탑형식의 탑중에는 재료가 돌인 경우가 있는데,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탑을 세운 경우

 전탑을 모방하였다 하여 모전석탑이라 부른다.

 

- 대저 인류의 조상들이 더위와 추위, 글구 짐승 등으로부터 안전하기 위해 집을 만들었고   

 그 재료는 풀과 나무, 흙과 돌, 벽돌, 씨멘트, 철강 등등 지속적으로 발전돼 왔다.

 다만 재료들은 주변에서 가장 구하기 쉽고, 다루기 쉬우면서도 견고하다면 최상이 아니었을까??

 

- 탑 역시 건축의 일부이다 보니 탑의 재료 역시 건축재료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나라별로는 중국에는 벽돌로 지은 전탑이, 일본에는 목탑이 즐비하고,

 한국의 목탑은 불타 없어져 명맥만 유지하고, 전탑 역시 두 손으로 꼽을 정도로 많지 않으며, 

 다만 석탑은 1천여기가 존재한다고 한다.

 그 전탑을 답사하려 한다.

 

- 한국 석(전)탑의 역사를 이야기 할 때 

 목조였던 탑의 재료가 내구성과 화재 취약성으로 인해 더 견고한 재료를 찾는 과정에서

 그 재료가 돌이나 벽돌로 바뀌지만 목조건축의 구조와 모형이 유지되는 경우가 있고

 중국의 전탑을 모방하여 석재(벽돌)를 사용한 석조탑(모전석탑)과 본래 전탑을 생각할 수 있겠다.

 뭐 전문가적인 의견이라기 보다는.......

 물론 전탑과 모전석탑은 엄연히 구분지어져야 겠지만 재료보다는 겉모양만으로 구분해 보았다.

  

- 어찌되었든 전탑(모전석탑)이 집중적으로 남아있는 지역이 경북 안동, 의성, 영양 등이며

 이외에도 경주 분황사터, 제천 장석리, 태백산 정암사, 여주 신륵사 등이다.

 정암사 수마노탑이나 신륵사 전탑은 눈요기라도 몇번 하였으니 이번에는 경북지방을 찾은게다.

 전(모전석)탑은 작은 재료 수만개(신세동탑의 경우 약 70,000개)를 결구하였으니 그 공덕은 ??

 과연 얼마나 클것인가를 생각하면서

 

- 먼저 중앙고속도로 남안동 교차로를 나와 조탑동 오층전탑을 찾았으나...아뿔싸 공사중이다.

 공사기간은? 미륵사지 석탑보수공사에서 보듯이 알 수가 없다.

 공사중 겉모습만 간단히 촬영을 하고 자료로 대신할 밖에.......

 보지 않은 것을 보았다고 하는 것도 죄악일 터.....

 일반적인 사항 몇 가지만 첨언하고자 한다.

 

- 안동에는 유난히 전탑이 여러기 소재해 있다.

 조탑동이라는 지명도 아마도 조탑(造塔) 즉 탑을 지은 마을이니 탑에서 유래된 것이리라.

 조탑동 전탑은 5층으로 보물 제57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진자료를 보아하니 전탑이면서도 1층 몸돌은 화강암으로 되어있다.

 또한 1층 몸돌에 감실이 있고 양쪽에는 인왕상을 조각하였다.

 상륜부는 없어졌고 각부 벽돌의 생김새가 다른 것은 보수의 흔적이란다.

 

- 조탑동 오층전탑 보수공사 안내판과 가림막 등       

 

- 인터넷에서 구한 자료사진입니다.

 

- 첫 답사지 조탑동에 실망을 간직한채 안동역으로 향한다.

 어떤 연유로 안동지역에 여러 기의 전탑이 소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다만 안동지역에 좋은 화강석이 없다는 둥, 독특한 지방의 정서라는 둥, 여러 의견이 제시되지만

 어느 것도 확실한 답은 아니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

 

 안동역 옆에 보선사무소(철도 레일을 관리하는 곳)가 있구 그 안에

 동부동 전탑과 운흥동 당간지주가 곁에 서 있다.

 세상에 한 장소에 있는데 소재지를 기준으로 지은 이름이 동부동과 운흥동으로 갈린다.

 정확한 지명은 운흥동이 맞지만 1963년 전탑을 문화재로 지정할 즈음 작명가의 실수(?)가 있었나?

 

-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당초 법림사(法林寺)라는 절이 있었단다.

 당시 기록에는 7층이었고 상륜부는 금동제였다 하니 대대적인 수리과정에서 층수 변동이 있었고 

 상륜부는 임진왜란 막바지였던 1598년 명나라 군이 도둑질 해갔단다. 

 그나마도 지금은 폐사되고 5층의 전탑과 당간지주 1기만 전한다.

 그러고 보니 안동,의성,영양지역에 있는 전탑 또는 모전석탑들은

 화려했던 절집은 사라지고 민가나 관공서 옆에 서서 그 옛날을 얘기할 뿐이다.

 영남지역에 불교세가 강하다고는 하지만 호남지역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구

 폐사된 절집이 의외로 많다.

 아마도 조선왕조 500년을 보내는 동안 왕명 즉 국가 정책에서 치이고,

 별루 잘나지도 못한 양반네들이 집터를 잡고, 묘지 터를 잡으면서 절집을 망가트리지 않았을까?

 

- 보선사무소에 주차를 하고 탑을 살펴본다.

  5층의 전탑은 우선 돌로된 울타리로 보호되고 있다.

 3층으로 된 기단은 장대석이라고 할 수는 없는 4개의 돌을 연결하였으나 웬지 단단한 기운은 없다.

 1층 탑신 남측에는 감실이 있는데 감실의 틀이 부러질 듯 약하게 보인다.

 더불어 각 층마다 감실을 표현한 것두 이채롭다.

 1-4층의 지붕돌에는 기와가 장식되었는데 장식인지 실용성인지는 잘 모르겠다.

 또한 2층 감실방향에는 인왕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무서운 상이 아니라 앙증맞다 해야 할까?

 탑의 시대적 구분에서 중요시 되는 지붕돌 받침(층급받침)은 

  · 1층 10, 2층 8, 3층 6, 4층 4, 5층 3층으로 줄어 들어 안정감을 준다.. 대신 둔중하다 할까??

  · 아울러 각 층마다의 기와설치는 목탑의 잔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 과거 이름 바꾸기(개명)가 쉽지 않은 시절이 있었다.

 이름은 표시이고, 표시는 곧 약속이다.

 본질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걍 무상하고 공한 것이 되지만 현실은 다르다.

 무상타 하여 이름을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 치부한다면 세상은 참 혼란할 것이다.

 그런 혼란을 예방하기 위해 개명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 것으로 이해된다.

 

- 특별히 잘 생긴 것은 아니지만 당간지주다.

 오늘날 당간지주를 소개하면서 걍 절집 행사를 알리던 당을 매달던 기둥이라 소개한다.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인간은 하늘로 하늘로 향하고픈 속성이 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뭐 그런 것두 있지만 절대자는 하늘에 산다고 생각했다.

 뭐 증명되지 않은 것이지만 말이다.

 절집소식을 알리는 이 외 높게 세워진 기둥은 하늘과의 거리를 좁히는 아니면??

 아늘과의 교감을 위한 통로로서의 기능이 있었는지도 생각해볼 일이다.  

 

- 안동에 분포된 3기의 전탑을 보면서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절집의 중앙을 떡하니 차지하고 그 위용을 뽐내고 있어야 할 탑들이

 전답 가운데. 아니면 안동역 보선사무소 옆, 아니면 중앙선 철로변에 외로이 서 있기 때문이다.

 무슨 연유일까??

 조선을 개국하는데 혁혁한 조언자 역할을 하신 스님이 무학대사이시다.

 지공, 나옹, 무학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보면 화려하기 그지없지만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나라에서 스님의 설 자리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왕사로 임명하는 등 고려시대와 다름 없는 정책을 펴기도 하였으나

 마음은 이미 불교에서 떠나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는 아마도 고려시대 스님들의 온갖 부조리한 면이 당연히 개혁의 대상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지금은??

 불교행정 대빵스님이 매춘, 도박, 폭력 기타 등등으로 매도되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된 반박도 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고(사실이란 말씀??).......

 

태종은 공인사찰(公認寺刹) 242사(寺)를 정하고 상주(常住) 스님의 정원을 책정하였으며

 종단도 종전 11개에서 7개로 축소시킨다.

 세종은 그나마의 7개 종단도 선교 양종(禪敎 兩宗)으로 다시 옥죄고 만다

 성종 23년에 도첩제(승려가 되려는 자격심사)를 폐지하여 공식적으로 승려가 되는 길을 막았고

 간경도감을 폐지하고 나아가 승려들을 환속시켜 절이 텅텅비는 지경에 이른다.

 뭐 그래도 종교라는 것이 위정자의 뜻대로만 되었겠는가?

 

- 이러한 강력한 불교 억압정책은 양반 사대부들의 개인적 불교 신앙마저도 극도로 위축하여

그나마 유지되던 불교식 장례나 제사법도 점차 사라져 갔다.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은 뭐 사찰에 있던 승려들을 쫓아내어 관노로 삼았고 토지도 몰수하고

승과(僧科)도 폐지하였고, 선교양종의 본사도 폐지한다.

심지어 놀이터 삼아 유흥에 빠져들었으니.......에휴........

 

명종 때 어머니 문정왕후가 오늘의 봉은사를 중심으로 승과를 시행하고 혔으나

 (그 결과 서산, 사명 등 임진왜란으로 부터 나라를 구한 스님이 탄생)

 이후에도 절집의 사정은 나아지지 않는다.

 

- 양반 사대부들은 절집을 유흥장소로 삼고 절집에는 한지를 맹글어라, 숯을 구워라 하는가 하면

 성을 축조하고, 왕조실록을 지키는 승병 역할을 주기도 한다.

 이 때 경상도 고성 옥천사에서 일어난 사건을 한마디 하고 간다.

 · 지역 토호인 이씨 집안에서 옥천사에 한지를 무지막지하게 착취하였는데

 · 또 다시 족보를 만들기 위한 한지를 요구한다... 뭐 이는 뇌물용으로 족보용지는 핑게지만.......

 · 이에 옥천사 주지스님이 한통의 편지를 보내는데 이를 받아본 이씨 집에서 요구를 중지한다.

 · 내용인 즉 玉泉寺造紙 盡入李氏譜紙中 今番 無力 (옥천사 조지 진입이씨보지중 금번 무력)

   한마디로 옥천사에서 제조한 종이가 이씨 집안 족보용지로 다 들어가 없다는 말씀!!!      

   통쾌하면서도 씁쓸하다.

 

- 한 없이 추락하는 불교의 입장에서 절을 뺏기고, 절집이 양반가 묘지가 되고,  절집이 양반가 사당이 되고,

 절집의 목재들이 양반가의 안채, 사랑채가 되는 것을 그저 지켜본다.

 사대부의 입장에서 궁궐과 동급으로 사용되는 사찰 부재들은 자신들의 집을 짓기 안성마춤이었던 것!!

 그나마 요즘처럼 절집이 산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시내 요소에 있었으니 운반도 편리할 터.....

 여러 조건에 안성마춤인 절집들이 양반가에 복속되는 비극을 맞은 것이리라.

 

- 그러면 탑은????? 

 오늘날에야 탑이 문화재적인 가치다 크구 사리구 등도 엄청난 가치가 있겠지만..........

 조선시대에 걍 돌덩어리구, 벽돌덩어리였던 것!!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지만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에 산재한 탑과 부도 등에 대한 가치를 알아본 일본인들이 앞다퉈 반출을 시도했으니 

 절집은 사라지고 반출에 어려움이 컸던 거대한 석탑과 전탑 등이 나를 반기는 것으로 짐작된다.

 오호 통제라.........

 

-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

 기차길 옆 오막살이는 아니지만 중앙선 철로 옆에서 기적소리와 엄청난 진동을 온몸으로 느끼며

 아직까지 건재하고 있다.

 근데 그 이유를 척 보니 알 것 같다.

 아마도 화강암 등으로 지대석이나 기단석을 삼았다면 철로변의 진동으로 몇번이나 무너졌을 터...

 지대석과 기단석을 그 튼실하다는 씨멘트로 발라 놨다.

 그래서 무너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내가 잘못 판단했나???

 본래의 절터는 의성김씨 고택이 들어서 있다. 

 근데 이 고택도 문화재란다.   만약 절집의 역사가 면면이 이어저 왔다면???????

 

- 안내문을 보니 법흥사지 칠층전탑이다.

 근데 지명은 여그도 법흥동이란다....

 과거 작명하시던 분이 건너편 신세동과 착오를 일으킨 것인지는 모르것다.

 기단석의 면석에는 8부신중과 사천왕상이 양각되어 있다.

 기단을 씨멘트로 바르면서도 한가닥 의식이 있어 면석의 팔부신중을 가리지 않은 것이리라......

 

- 지금이야 안동댐이 축조되어 낙동강변 푸른물에 그림자가 비출 수도 있을터이지만

 안타깝게 중앙선 철도가 탑 상층부를 지난다.

 절해고도의 섬처럼 외로운 탑이 되어 있는 것이다.   표현을 빌자면 기찻길옆 칠층전탑!!!

 그럼에도 7층의 위용은 대단해 보인다.

 또한 벽돌을 쌓은 솜씨도 정갈하기까지 하다.    

 디만 싱륜부는 안동객사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기 위해 녹여부렀단다.

 만약 금동의 상륨부까지 모두 갖추고 낙동강 푸른 물에 그림자를 비출 수 있다면?????

 

 

 

 

  

 

- 한편으로 옹색한 모습이 짠하게도 느껴지지만 자랑스런 불교유산이다.

 

- 역시 1층 면에 감실이 조성되어 있지만 널판지로 덧댄 모습이다.

 또한 2-3층 에는 기와지붕을 흉내낸 모습도 엿볼 수 있다.

 

- 내 모습도 탑에 비견해 보았지만 사진 구도 잡는 거 하며.........쯔쯔

 

안동의 음식하면 사대부가의 그것이 생각나지만 지금 이순간 생각나는 건 찜닭이다.

 시장에 형성되어 있는 찜닭골목을 찾았다.

 재래시장은 상당히 정돈되어 있으니 행정당국의 노고가 짐작된다. 

 달지 않게 해 달라 특별히 부탁을 하여 괜찮았으나 둘이 먹기에는 다소 벅차다.

  

 

- 이 쯤에서 안동의 전탑여행을 마무리 한다.

 사실 종교는 위대한 가르침이기는 하지만 시대를 앞서가지는 못한다.

 석가모니께서도 수 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사후에 그 가르침이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예수도 마찬가지다.

 십자가에 못이 박힌지 300년이 지난후에 로마 콘스탄티누스 황제때 인 313년에야 공인이 되었다.

 무슬림은 조금 다를까???

 종교 역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성주괴공 하였다는 것이다.

 즉 종교가 절대선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지향할 뿐........

 

         혜림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