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왕궁면 궁평리에 있는 제석사지를 찾았다.
뭐 일요일... 모악산엘 올랐다 다소 피곤한 몸이지만.....
머지않은 폐사지를 찾는 시간은 마눌님과의 대화의 시간이 되기도 하고....
남부 우회도로를 따라 익산 왕궁까지 단숨에 달린다.
왕궁리오층탑을 바라보면서 미쓰김의 안내를 받아 시골길을 달린다....
십여분 남짓 왼편에 정미소가 있고 그 바로 옆에 제석사지 안내판이 보인다.
- 사적 제 405횡기도 한 제석사지는 몇개 남지 않은 백제사찰의 계보를 잇고 있어
오늘날 그 중요성이 다시 인식도 있단다.
금마에서 동남쪽 약 6㎞ 떨어진 궁평(宮坪)마을 입구에 있는 제석사지(帝釋寺址)는
특이하게 백제 무왕이 수도를 왕궁평으로 옮기려고 지은 궁궐 근처에
불교의 수호신인 제석천을 주존(主尊) 불상으로 모신 절 이었다 한다.
제석천을 주존으로 모셨다는 야그는 사실 첨 듣는다.
- 현재 목탑지 이외에는 대부분 민가가 들어섰거나 논밭으로 경작되어 그 흔적이 없구
절터가 발굴되고 사적 제405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을 뿐.....
폐사지의 쓸쓸함을 온 몸으로 전하는 곳이기도 하다.
내궁이란 내원당(內願堂), 내불당(內佛堂), 내사(內寺)의 성격을 띤
제석천을 주존으로 모시는 제석사원(帝釋寺院)을 말한다.
이곳의 사지가 제석사지라는 것은 왕궁면이
일제 초기 1913년 이전에는 제석면(帝釋面)으로 불리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1942년도 국립공주박물관에 기탁된 제석사(帝釋寺) 명(銘)의 명문기와와 함께
인동문와당(忍冬紋瓦當)을 통하여 이곳이 백제시대 제석사지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따라서 왕실이나 국가 차원에서 거대한 사찰을 건립하였다.
신라에서는 황룡사(皇龍寺)가, 백제에서는 미륵사(彌勒寺)가 그런 성격의 사찰이다.
그리고 고대의 도읍지에는 제석천을 주존으로 모시고 신앙하는 제석사가 있었다.
중국 육조시대(六朝時代)에 육고(陸杲)) 등이 지은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는
백제 무왕40년(정관(貞觀)13년 서기 639년)에 벼락으로 폐사(전소)되었으나
탑 아래 심초석에 넣어 두었던 불사리와 동판금강반야경을 넣었던 칠함만이 보존되어
다시 사찰을 지어 안치하였다고 기록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정관(貞觀) 13년(무왕 40년, 639) 11월 뇌우에 의하여
제석정사의 불당, 칠급부도(七級浮圖) 및 낭방(廊房) 등이 모두 불타 버렸다.
그런데 탑 아래의 초석 속에는 종종칠보(種種七寶)와 불사리를 넣은 수정병,
동판으로 만든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목칠함에 넣어두었는데,
초석을 빼내보니 모두 소진되고 오직 불사리병과 반야경을 넣어둔 칠함만이 그대로라..
그러나 수정병은 내외가 철견(徹見)하고 뚜껑 역시 움직이지 않았는데
사리는 모두 없어져 나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병을 가지고 대왕한테 가니 대왕은 법사를 청하여 참회하고 병을 열어 보니
불사리 6개가 모두 병 안에 있어서 밖에서도 보였다고 한다.
이에 대왕과 여러 궁인들은 불교에 대한 신앙을 배가하고
다시 탑을 쌓아 이를 저장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왕궁리오층석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와 매우 흡사하다.
다만 동판 불경이라 하는데 실제로는 순금제 금판 불경으로
구리와 금의 차이가 날 뿐이다. 그리고 사리가 6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실제 왕궁리오층석탑 안에서는 16개가 들어 있었다.
또, 목칠함 속에 있었다고 했으나 금제함 속에 들어 있었던 점만이 다르다.
그 범위를 확인하기 위하여 1993년 말에서 1994년 초에 걸쳐서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 발굴을 실시하여
목탑지·금당지 기단·강당지 기단이 확인되었다.
목탑과 불전 사이 그리고 불전과 강당 사이에는 거의 같은 간격으로 떨어져
건물을 배치하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 또는 금강사지(金剛寺址)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일직선상에 앞에는 중문(中門)을 두고 그 뒤에 탑과 불전과 강당을 배치하여
중문에서부터 강당까지를 회랑(廻廊)으로 구획한
1탑1금당(一塔一金堂)의 가람배치임이 확인되었다.
(제석사지 정비사업 안내판)
(금당지로 추정된다) 뒤쪽 말목 박힌 부분이 강당지??
(목탑지로 보인다)
- 다만 현재는 발굴 후 다시 덮어버려 현황을 알 수는 없다.
목탑지(木塔址)는 외형상으로 파악이 된다.
사방 약 12m 정도의 규모와 약 1.5m 내외의 높이로 토단이 남아 있고,
그 위에 2매로 절단된 대형의 심초석(心礎石) 1기가 남아 있어
육안으로 이곳이 목탑지임을 알 수 있다.
토단의 한 변이 12m 정도이기 때문에 목탑지의 규모는
한 변이 대체적으로 이 정도의 크기일 것으로 판단된다.
금당지의 기단구조는 미륵사지 탑지나 불전지에서와 같은 형태의
2중기단(二重基壇)으로 확인되었다.
즉 제석사지 불전지의 기단구조는 면석을 겸한 지대석 위에
하층기단 갑석(甲石)을 올리고 갑석의 안쪽에 상층기단 지대석을 두고
그 위에 면석과 갑석을 올린 형태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건물의 측면부에는 계단을 시설하지 않고 미륵사지 불전지에서와 같이
전면과 후면에만 계단을 만들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동서의 길이는 사찰중심선을 기준으로 하여 좌우 대칭으로 보았을 때
약 52.7m로 확인되고 면적은 약 291평의 규모로 보인다.
기단구조는 단층기단(單層基壇)으로 이루어졌다.
평기와 조각들이 대부분인데, 백제유적에서는 처음으로 암막새가 출토되었다.
『관세음응험기』에 의해 창건과 폐사연대를 알 수 있다는 점과 무왕대에
'93년 실시된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발굴(시굴)조사결과
목탑지·금당지·강당지 등의 기단이 확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유적에서는 처음으로 암막새가 출토되어 백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이란다.
(벌써 십여년 전 남도 답사시에 가져온 동백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웠다)
- 귀중한 사료를 볼 수 있어 기분 좋은 일요일의 마무리가 되었다.
혜림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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