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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전주동학

10. 어진을 박물하는 어진박물관

by 혜림의 혜림헌 2026. 10. 28.

다음은 발길을 어진박물관으로 돌립니다.

조선왕조는 태종 10년(1410) 태조 어진을 전주에 봉안하였습니다.

조선은 건국 후 한양을 비롯하여 평양, 경주, 개경, 영흥, 전주 등 여섯 곳에 태조어진을 봉안하였음에도 경기전 어진만 전합니다.

이러한 귀한 어진을 소중하게 보존하기 위해 박물관을 건립합니다.

박물관은 태조어진 경기전 봉안 600주년이 되는 2010년에 맞춰서 개관하여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박물관은 지상 1층, 지하 1층의 한옥으로 건축되었습니다.

특별히 경기전의 경관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전시실을 주로 지하에 배치하였으며, 지상에는 어진실만 자리하고 있습니다.

진본인 어진은 태조어진이 유일하며, 영조·철종·고종·순종은 모사된 어진을, 세종과 정조는 표준영정을 모시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조선의 27명의 왕 중 현존하는 어진은 태조·영조·철종에 불과하며, 고종과 순종은 사진을 활용해 제작한 걸로 보면 됩니다.

 

지하는 상설 및 기획전시실(역사실, 가마실)로 운영됩니다.

역사실에는 어진 이안통, 용두, 복제본 조선왕조실록이 있습니다.

가마실에는 어진을 이동시킬 때 신위를 모시는 신연(神輦), 향로를 얹는 향정자(香亭子), 어진 등 귀중품을 옮기는 채여(彩輿), 왕이 타는 가교(駕轎) 등의 가마류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어진이 어떻게 제작되는지를 알아봅니다.

어진 제작에는 왕과 대신, 화사(畫師), 공장(工匠)이 참여합니다.

어진은 도사(圖寫), 추사(追寫), 모사(模寫) 방법으로 제작됩니다.

도사란 재위 중인 왕의 용안을 직접 보면서 그린 어진입니다.

추사는 왕이 승하한 뒤 기억에 의존하여 그린 어진입니다.

재위기간이 짧았던 왕이나 단명한 왕세자를 그린 초상화와 근자에 제작된 표준영정은 추사의 방식으로 제작되었다고 봅니다.

모사란 기 봉안된 어진이 훼손되었거나 혹은 새로운 진전에 봉안할 경우 기존의 작품을 범본(範本)으로 새로 제작한 어진입니다.

 

도사와 모사가 이처럼 구별되기 시작한 시점은 1713년입니다.

그 이전에는 도·모사를 단순히 화(畫) 또는 모사(摹寫)라는 용어로 구분 없이 사용되었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어진의 제작 과정이나, 진전에 봉안하는 절차들은 세부적으로 기록되어 전승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전해지는 어진은 극소수에 그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전해지는 어진으로는 경기전의 태조어진이 대표적이고, 창덕궁에는 영조와 철종 그리고 익종(효명세자 추존), 영조의 즉위전인 연잉군 시절에 그린 도사본이 현존하는 어진의 전부입니다.

 

이처럼 어진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이유를 알아봅니다.

고대의 어진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원본이 보존되기가 어렵습니다.

고려왕조 어진은 세종 시절(1426년) 도화원에서 수집하여 태웠고, 1428년에는 역대 고려왕의 그림과 조각상을 땅에 묻었답니다.

조선 초기 왕씨 학살, 숭유억불 등 고려시대 지우기가 자행됩니다.

아마 강력한 과거사 지우기가 왕의 명령으로 시행되었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남아 있던 안성의 공양왕 어진을 암자로 옮기고, 용천사 소장 왕건의 초상은 숭의전으로 옮기는 등의 기록이 전해집니다.

이후 왕건과 공민왕 어진은 일제강점기까지 일부 사찰에 있었지만, 한국전쟁 시기 사찰과 함께 재로 변했다고 보면 됩니다.

 

전국의 산제당과 사찰 등에 유명한 왕과 인물의 초상화로 알려진 그림들은 대부분 작자를 알 수 없는 등 인물화로 보기 어렵습니다.

안성 칠장사에 궁예의 초상으로 알려진 벽화도 근세의 작품입니다.

특히 일부 무속인들이 모시는 초상화는 상상화로 보면 무난합니다.

대관령 국사당 범일국사, 전국 각지의 최치원 초상화도 같습니다.

다시 말해 이들 초상화는 추사(追寫)도 아닌 상상화라는 겁니다.

태조 어진이 더 없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