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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전주동학

9. 와룡매와 예종대왕 태실

by 혜림의 혜림헌 2026. 10. 22.

정전을 나와 와룡매와 예종대왕 태실을 살펴봅니다.

와룡매는 경기전 정전에서 샛문으로 나오면 만나는 백매화입니다.

수령이 100년 정도라는데 용트림을 한 수형이 아주 매력적입니다.

우선 1m가 채 안 되게 솟은 나무는 구부러져 땅에 머리를 박을 듯 하다 쳐들어 잔가지를 뻗고, 봄이면 하얀 매화향을 발산합니다.

경기전에는 여러 그루의 홍매화도 와룡매와 시차를 두고 핀답니다.

 

조선 8대 왕인 예종의 태(胎)를 봉안한 태실과 태실비를 봅니다.

태실은 왕가의 자손이 태어날 때 달고 나온 탯줄을 봉안한 장치로. 사찰의 승탑과 유사하며, 옆에 세운 비가 태실 비입니다.

예종대왕 태실과 비는 당초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 태실마을 뒷산에 있었는데, 1928년 조선총독부가 태 항아리를 서울로 가져갑니다.

태 항아리도 없는 훼손된 태실과 비는 구이초등학교 부근으로 옮겨 관리하다가 1970년 경기전으로 옮겨 왔다고 합니다.

 

조선왕실의 태실은 길지를 선정하여 태항아리는 지하에 안치하고 기단석으로 덮은 다음 개첨석과 중동석, 지붕돌로 마무리합니다.

예종대왕 태실은 팔각형 돌난간 안에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둥근 돌을 얹고 지붕돌로 씌운 형태로 가봉비(加封碑)까지 세웠습니다.

가봉비는 태실의 주인공이 즉위했을 때 특별히 세운 비석을 칭하는 단어로 선조 11년(1578)에 건립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가봉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비신, 뿔 없는 용의 모습이 새겨진 머릿돌이 아름다운 수작이랄 수밖에 없는 비입니다.

 

조선왕조의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훼손됩니다.

이왕직은 관리의 어려움을 이유로 태실종합관리계획을 수립합니다.

1929년 전국의 태실 54곳에서 태 항아리와 지석을 꺼내 서삼릉에 집단 봉안하고, 왕자와 왕녀, 후궁의 묘 45기도 일거에 옮깁니다.

왕조가 사라진 태실의 유물은 도굴을 당하고, 민간에 매각 되거나, 명당이라 소문이 났으니 아마 암장도 성행했으리라 짐작됩니다.

그 힘이 다하면 영원성이 부정되는 게 세상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