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십년만에 미시령을 넘는다.
요즘은 터널이 뚫렸다지만 옛 추억을 더듬어 고갯길을 향한다.
양양의 진전사지와 선림원지를 가는 길이다.
(미시령 정상에서 바라본 양양 시내)
-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宗祖)는 도의국사다.
1935년 대처육식(帶妻肉食)에 반대하는 선학원을 중심으로 선종중심의 정통승려임을
내세운 조선불교선종의 종헌이 선포되나 큰 힘을 가지지는 못합니다.
다시 1937년 이종욱, 한용운, 김법린 스님 등을 중심으로 총본산 건립운동을 시작
1938년 현 조계사를 완공하여 일제의 조선불교선교양종에 대항하는
조계종의 기치를 높이 세웁니다.
그러나 이 때의 조계사는 조계사가 아닌 태고사였습니다.
아마도 태고 보우스님을 종조로 보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 해방된 나라에서 기독교는 미국을 등에 업은데 이어 이승만이라는 장로대통령을
올라타고 그 세를 넓혀가는 데 반해 불교는 지리멸렬 허약하기만 합니다.
대처승이 자리잡은 절집에서는 스님의 갓난아기 울음소리 요란하고,
스님의 아들딸네미 기저귀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스님네의 부부싸움소리는 산골짜기에 메아리치고,
스님부부의 열락이라는 극락을 향한 감청소리는 밤하늘에 울려 퍼집니다.
이것은 진정한 절집의 모습은 아닙니다. 그러나 현실입니다.
- 자연히 이래서는 안 된다는 불교정화운동이 일어납니다.
작명을 점잖케하니 정화운동이지 대처승을 몰아내자는 운동이요, 절뺏기 싸움입니다.
- 싸움은 세가 중요하지만 세를 모으는 것은 명분입니다.
"율장에 대처없다"는 여섯 글자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명분보다도 중요한 것은 밥그릇입니다. 그중에서도 먹던 밥그릇입니다.
처자식을 거느려야 하는 대처승들은 먹던 밥그릇이요,
비구(니)승들은 먹어야 할 밥그릇입니다.
더우기 먹던 밥그릇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대처승들의 저항은 상상 이상입니다.
하지만 밥그릇을 빼앗아야 하는 비구(니)스님의 숫자는 절대부족입니다.
자연히 수요는 공급을 창출합니다.
절집과 인연이 전혀없던 이상한 사람들이 파업현장에 용역깡패 들이치듯 합니다.
기나긴 싸움 끝에 휴전을 합니다.
휴전을 향한 합의는 만들어지고 깨어지기를 반복하다가 통합종단이 출발합니다.
통합종단은 비구와 대처가 한지붕아래 살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때가 1962년 4월 11일 입니다. 이른바 대한불교조계종!!!!!
뭐 이 합의도 오래가지 못하고 1970년 5월 대처승 측에서
태고종을 설립하여 독자적인 출발을 하면서 떠나갑니다. 바이바이!!!!
- 대한불교조계종!!!!
근데 종조를 누구로 모실것인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합니다.
1994년 9월 종단 개혁과 함께 마련된 현행 조계종 종헌(宗憲)에는
도의 국사를 종조로, 태고 보우를 중흥조로, 보조 지눌스님을 중천조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종명(宗名) 및 종지(宗旨)를 다룬 종헌 제 1장 1조에는
“본종은 신라 도의국사가 창시한 가지산문에서 기원해
고려 보조국사의 중천(重闡)을 거쳐 태고 보우국사의 제종포섭으로서
조계종이라 공칭하여…”하니 오늘도 논란이 있고 다툼이 있습니다.
- 그렇다면 누가 조계종의 종조이며 중흥조일까? 보조 지눌일까? 태고 보우 일까?
아니면 현행 조계종 종헌 종법에 나와 있는 도의 국사를 종조로 보는 것이 맞을까.
누구를 종조로 보느냐에 따라 조계종의 이름과 연계되니 민감한 부분입니다.
- 저야 따질 생각은 전혀 없구요. 나왔던 주장들만 잠시 상기 해 보면
1. 보조국사 지눌이라는 주장은 보조국사 이후 비로소 조계종이 설립됐다는 주장으로
조계종이라는 이름만으로는 가장 근접하다 할 것입니다.
2. 태고 보우라는 주장은 당시 구산선문은 전하는 것처럼 커다란 세를 가진 것은 아니며
그나마 가지산문이 태고 화상의 덕으로 세를 유지하였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3. 도의국사가 종조라는 주장은 이 땅에 선종의 씨앗을 뿌린 이 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으니
도의국사가 활동했던 때는 조계종이 성립되기 400여년 전이고
태고 보우는 조계종이 성립되고 약 200여년 뒤의 일이니 조계종과 관계가 없구요,
조계종의 종조는 보조 지눌이라는 주장으로 환부역조(換父易祖)를 말합니다.
환부역조 즉 아비를 바꾸고 조상을 거시기 한다는 무시무시한 말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조계종에서 도의스님을 종조로, 보조국사를 중창조로,
태고 보우스님의 제종포섭 즉 오늘날 조계종의 우산을 만드신 분이니.... 뭐
그대로 따르고 인정하고 하면 될 듯합니다.
더우기 조계종에서는 도의, 보우, 지눌 등 세 스님을 각별히 모시고 있으니 뭐.......
따지고 보면 석가모니부처님이 계신데 종조타령한다는 것도 우습구요.
- 웬 이야기가 이리 기냐고 하신다면.....
찾는 폐사지가 바로 도의국사가 이 땅에 선종을 펴시려다 어려움을 겪자
몸을 의탁한 곳이 양양의 진전사이고 찾는 곳이 바로 그 곳이기 때문이지요.
- 설악을 내려와 다시 설악을 향하여 다시 한참을 달려 골짜기에 들어서니
벚나무가 보이고 그 안쪽으로 근사한 탑 한 기가 보입니다.
벚나무 길을 따라 계단에 오르면 바로 진전사지입니다.
진전사지에 있는 유물이래야 탑 한기와 부도 한 기...
와!! 산 넘고 물 건너, 미시령까지 넘어 간 폐사지에 이걸 보러 왔다니 하면서도.....
도의선사는 마조도일의 법을 이은 서당지장(709-788)에게서 공부를 하고
귀국하여 교종이 판치던 신라사회에 선종을 설파하신 분입니다.
- 즉 문자를 세우지 않고, 경전 외에 따로 전하는 것이 있으니
사람의 마음을 직접 가리켜 본성을 보는 것이 부처가 되는 길이라 설하신 거구
(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
6조 혜능스님의 가르침과 마음이 곧 부처라는(自心卽佛) 마조스님에 이르는
남종선의 골수만을 전하니 당시 사회를 주름잡던 교종의 입장에서 기가 차지요.
- 거기에 더하여 염불하고 경전이나 외우는 것이 불교의 전부는 아니며
본연의 마음을 아는 것이 진짜 불교라 하는가 하면
중생이 곧 부처라 외치니 기층세력에게서 배척을 받았을 것은 자명한 일!!
- 이런 고로 도의에서 2조 염거화상으로, 염거에서 보조국사로 이어지는
선종의 맥은 도의국사가 떠난 통일신라 말기에 이르러서야
지방호족세력의 호응을 얻게 되어 오늘 말하는 구산선문을 이루는 것입니다.
즉 진전사는 교종에서 선종으로 주류세력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는데 존재의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도의국사가 선종을 널리 펴 일가를 이루었다기 보다는
진전사에 은거하여 선종의 맥을 이었다는 표현이 어울립니다.
(진전사지 앞에서)
(진전사지 안내판)
- "이 절은 우리나라 선종을 크게 일으킨 도의선사가"로 기록하고 있는
진전사지 안내판은 다소 과장이 있는 듯 합니다.
선종을 크게 일으켰다는 말과 은거였다는 표현은 이율배반적이니까요....
정확한 표현은
"도의선사는 선종을 우리나라에 소개하고 당시 교종중심의 불교 속에서
주류사회의 배척을 받는 어려움속에서도 선종이 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진전사에 은거하여 제자를 양성하는 등"
뭐.... 이런 정도로 소개하는 것이 당시 상황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요??
(진전사지 3층탑) 국보 122호
- 지대석을 단단하게 설치하고 2층의 기단을 마련했다.
근데 각 기단마다에는 범상치 않은 새김이 있다.
하층기단은 천의를 날리고 있는 비천상을 조각하였고
상층기단에는 팔부신중을 조각하였다.
특히 상층기단의 팔부신중은 도드라짐이 커 입체감과 생동감이 있다.
1층의 몸돌에는 아마도 사방불을 모신 듯.....
각 면 마다 한 분씩 네 분의 여래좌상이 계시는데 연꽃좌대위에 결가부좌,
두광과 신광을 따로 갖추었고 나발과 육계도 큼지막하다.
1층 몸돌 가운데에서 사리공이 발견되었으나 사리는 간 곳이 없단다.
탑은 화강암이지만 검은 빛이 많아 전체적으로 까무잡잡하다고나 할까??
1968년 해체 수리하였단다.
(진전사지 부도)
- 진전사지 부도는 진전사지탑에서 조금 더 올라간 곳에 있다.
매운탕을 파는 것으로 보이는 집을 지나 언덕(언덕은 저수지 제방)을 오르면
오른쪽으로 가파른 길이 이어진다.
다시 한번 힘을 내어 오르면 최근에 세워진 진전사 건물이 나오고
진전사 마당입구 오른편 능선에 부도가 있다.
- 근데 이 부도는 그간 보아온 팔각원당형, 복발형, 석종형 등과 차이가 있다.
흡사 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모습이 다르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부도가 탑에서 유래되었다면 석탑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을 터.......
사실 이 땅에 선종이 등장하기전 큰 스님들 원효대사나 의상대사, 자장율사 등은
어느 한 분도 부도를 남기지 않으셨다. 이름이 작아서가 아닌 거다.
생로병사하고, 생주이멸하는 유장한 화엄의 세계에서 스님의 죽음은 걍 죽음이다.....
하지만 마음이 부처요, 중생과 부처가 다르지 않다는 선종의 입장에선 다르다.
큰 스님의 죽음은 곧 석가모니부처님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성대한 다비식이 치러지고 국왕에 버금가는 예우를 다해 사리를 수습하여 모신다.
즉 부도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선종이 이 땅에 확실히 자리잡았음을 의미한다.
- 도의국사의 부도로 추청된단다......
처음 만들어지는 부도이기에 정형이 없었을 터....
불탑의 예에 따르되 조금 다르게 한다.
2층의 사각 기단 위에 팔각원당형의 연꽃받침석을 얹고 몸돌과 지붕돌을 장식한다.
몸돌장식은 아직 문비가 생기기 전이라 액자 비슷한 문양만 있구
기와골이 없는 지붕돌 역시 팔각이며, 상륜부는 복련장식 위에 보주가 있으며
이 보주는 가운데 찰주를 박아 고정시켜 놓은 것이란다..... 눈으로 확인 안됨
(복원된 진전사.... 본래의 장소가 아님)
- 정면3칸, 측면 2칸의 주불전 지붕에는 치미가 올려져 위엄을 더한다.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승방과 요사로 보이는 부속건물이 두어채 있다.
선림원지........
- 선림원지 가는 길은 조금 멀다,,,,,,
뭐 강원도 양양인 것은 맞지만 말이다.
응복산 아래 미천골이 있고 근자에 자연휴양림이 생겼다.
자연휴양림에서 입장료를 내란다. 거금 5천냥.....
선림원지를 간다니.... 일단 내구 30분 이내에 돌아올 경우 돌려준단다.
30분이라 하니 괜히 마음이 바빠진다.
(선림원지 전경)
- 미천골 휴양림 계곡을 따라 500m쯤 올라가면 왼쪽의 가파른 산줄기가 숨을 고른다.
응복산, 미천골, 만월봉 등의 이름만 들어도 첩첩의 산중에 자리한 것을 알 수 있다.
관심있게 보지 않으면 지나칠 정도로 깊고 아름다운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다.
첩첩산중의 접근성이나 선림원(禪林院)이라는 이름에서 보듯 아낙네의 기도처로는
낙제점이지만 스님네들의 기도터로는 안성마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절터에는 삼충석탑과 석등, 부도, 부도비 등이 그 옛날의 영화를 증명한다.
이들 유물들은 제멋대로 흩어져 있던 것을 1965년 복원하여 다시 세운바
석탑을 제외하면 본래의 자리에서 다소 이동되었단다.
- 선림원은 804년 순응법사가 세운것으로 기록된다.
한국전쟁 때 월정사에서는 한 개의 범종이 불에 타 사라졌다.
이 범종이 바로 1948년 선림원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804년 순응법사가 주조했다는
기록을 명문에 새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근데 웃긴 것은 선림원터 허허벌판에 돌봐줄 이가 없어 월정사로 옮겼는데
잘 돌봐줄 것으로 믿었던 월정사는 제 한몸도 지키지 못하였고 범종이야 뭐......
이것이 세상사다...
상원사종, 성덕대왕신종 등과 동급의 신라 유물이었었는데.. 아깝다.
- 순응법사는 802년 해인사를 세운 것으로 해인사지에 기록된다.
선림원도 화엄사찰이었다는 거다.
근데 선림원에 남아 있는 홍각선사비는 화엄사찰이 선종사찰로 변화???
뭐 그 때 당시 절집 풍속이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화엄학을 공부하던 스님들이
신라말의 어지러운 세상을 떠나 참선수행에 매진하기 위해 깊은 산속 선림원에 왔다??
1985년 동국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을 한 바 900년 전후 유물이 나왔단다.
근데 왜 절집이 사라졌을까??? 과학이 그걸 증명한다...... 산사태란다.
산사태로 절집이 사라진 것이 900년 전후이고 다시는 재건되지 못하였다는 거다.
고려조나 조선조의 유물이 안 나왔으니 증거는 확실한 듯 하다.
(삼층석탑)
- 길에서 계단을 올라서면 바로 삼층석탑이 나타난다.
이층의 기단 위에 3층 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다.
우주와 탱주가 조각된 상하 기단, 특히 상층기단에는 우주와 탱주사이에 팔부신중을
조각해 놓았는데 현재는 그 구분이 어려울 정도다.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1매의 돌에 우주와 탱주, 괴임석과 빗물받이 등을 새겼구
특히 지붕돌은 5층 받침돌도 모양새만이구, 풍탁을 달았던 흔적은 전층에 걸쳐있다.
(홍각선사 부도비) 보물 446호
- 부도비와 석등은 한 곳에 있는데......
당초 귀부와 이수만이 선림원터에 있구 비신은 역쉬 박물관으로 옮겼다 했는데
현장을 가 보니 온전한 부도비를 볼 수 있어 좋았다.
용감무쌍한 모습의 귀부는 날카로운 발톱까지 씩씩함이 더하고
이수에는 일곱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다는데 다 세지는 못했다.
(선림원 석등) 보물 445호
- 이 깊은 미천골에 이처럼 당당한 고복형 석등이 있을 줄이야......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고복형이라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고
우선 복련을 두른 기단석은 귀꽃이 큼지막하고 간석(기둥돌)은 벨트모양 띠가 있다.
화사석은 아래에 안상이 새겨져 있구, 지붕돌은 단순하면서도 남아있는 귀꽃은 크다.
디테일한 부분은 그렇다쳐도 멀리서 보건, 가까이서 보건, 아!! 잘생겼다!!!
(부도) 보물 447호
- 언뜻 보면 볼품없는 부도임에도 보물 447호다.
이유가 있을 터..... 우선 완전하지 못하다... 위치두 제자리는 아니구(50m위쪽)
삼층의 기단부만 남아 있구 몸돌가 지붕돌을 간 곳이 없다.
아마도 일제시대 언놈(왜놈)덜이 사리와 부도 자체를 탐내 가져가려다 파괴된 듯하다.
그럼에도 상대기단석의 용조각이나 중대석의 복련, 하대석의 안상 등은 썩이다.
사료적으로는 부도 중대석에 운룡문이 나타나는 시원이라는 가치 있는 유물이란다.
(유물사진 촬영)
- 간단한 사진촬영을 마치고 귀가를 서두르는데 탑을 촬영하는 팀이 왔다.
그들의 준비물은 사다리 등은 물론이구 반사판, 조명 등을 들고 있다.
근데 분무기로 탑에 물을 뿌린다.
문외한은 궁금증을 못참아 묻는다!! "왜 물을 뿌립니까??"
시간은 골짜기에 산그림자가 드리우는 오후 다섯 시가 넘은 시각!!
유물사진은 강한 햇빛이 사라질 즈음 촬영한단다.
사진을 찍어본 분은 아실테니까... 강한 햇빛과 사진사이의 상관관계를.......
해가 질 무렵 하얗게 말라버린 돌에 물을 뿌려 양감과 질감을 살린다.
거기에 조명을 비추고 반사판으로 사각지대를 없이 한다.
글구 전문 사진사가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다.
에구!! 내 똑딱이 카메라는??
그래도 제대로 기록은 하니까
- 선림원을 나와 집으로 길을 잡는다.
내비 미스김에게 가는 길을 물으니 구룡령을 안내한다.
화면에는 굽이굽이 빨간 줄이 실타래처럼 엮여있다. 멀미 날 일이니...
최근 구룡령 아래로 터널이 뚫렸다는 데 자세한 내막은 모르겄다.
하릴없이 차를 돌려 양양간 고속도로를 진입한다.
달리고 달려 집에 도착하니 오메...... 10시가 지났다.
- 그리하여 3일에 걸친 폐사지 답사를 마치고 정리한다.
폐사지!! 앞으로 당신을 찾아 전국을 배회할 것입니다.
기다리시요...
혜림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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