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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

신원사 소림원의 미륵부처님이 나투신 사연

by 혜림의 혜림헌 2013. 7. 24.

 

- 신원사를 간다... 그것두 자주... 시절인연이 그리 되었나 보다.

 지난달에 두 번 왔구, 어제(2013. 7. 20일)왔구 오늘 다시 왔으니.......

 신원사 하면 중악단이 떠오르니.....

 신원사 공양실 앞 동종이다.

 공양하러 오시라 부르는 소리... 그 안을 보았다.  

 

 

- 신원사 하면 중악단이 떠오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오늘도 중악단을 향해.... 

 

- 천년탐물일조진이요,, 삼일수심천재보라!! 

 

- 중악단 안에 모셔진 산신도와 계룡산 신위!! 위패 

 

- 사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다.

 신원사에서 200여m 소나무 숲길을 지나면 소림원이라는 암자가 나온다.

 도중에 계룡산신제단을 알리는 작고 검은 비석이 있다.

 계룡산신제단(鷄龍山神祭壇)!!!!

 

- 말이 암자이지 번듯한 건물 하며.....

 

- 곱게 핀 능소화까지.......

 

- 김제 금산사는 미륵도량이다.

 그 미륵도량의 중심 미륵전에는 거대한 미륵부처님과 범화림보살, 대묘상보살이

 삼존불 입상 형태로 모셔져 있다.

 년 전 대묘상보살의 법신 일부가 탈락되어 보수수리를 하는 과정에서

 세분 부처님께서 문화재 지정이 안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전개하려면 정관 김복진이라는 조각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알려지기로 속리산 법주사의 현재의 청동대불이 모셔지기 전에 80년대 말까지 

 씨멘트로 조성된 미륵대불이 계셨었고, 제작자가 김복진이라는 야그가 전한다.

 그러나 이는 반은 맞구 반은 틀리다.

 

-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한국 근대조각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정관 김복진은

 구한말인 1901년에 나서 일제 치하인 1940년에 생을 정리했다.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정관은 일본에 유학을 하여 근대조각을 공부한 엘리트였고

 당시 엘리트가 걷던 보편적인 길 즉 사회주의에 심취한 젊은이 였다 한다.

 

- 40세에 요절한 그가 남긴 작품은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전쟁물자로 징발되었고

 6.25전쟁 때에는 작업실이 폭격을 맞아 그의 작품이 대부분 사라졌으니  

 남아 있는 작품은 금산사 미륵전 미륵부처님과 미륵부처님을 제작하기 전 

 모형으로 만든 길이 110센티미터의 소림원 미륵불이 유일하다.

 

김복진은 조각가로 활동하기 전 일제 하 문예단체인 토월회와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을 주도하며 항일운동을 하다 6년간 옥고를 치렀고

 이때 불교에 귀의하여 감옥에서 불상조각에 심취하였다고도 한다.

 짧은 생에에 6년간의 옥고를 생각하면 그의 작품이 단 두점인 것도 이해가 간다.

 

- 그러면 법주사 미륵불의 작자가 김복진이 아닌 이유는 무엇일까??

 불교에 귀의한 정관은 출소이후 불교조각에 적극 나섰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동자승의 불장난으로 금산사 미륵전 미륵부처님의 복장에 불이나고

 급기야 미륵부처님이 훼손되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에 금산사에서는 불상제작을 위한 모연을 실시하고

 정읍에 사는 김씨 성을 가진 갑부가 거액(15,000원)을 시주하여 불상제작에 착수한다.

 불모로는 여러사람이 추천되었으나

 일본유학을 통해 신문물을 배워온 정관 김복진이 낙점된다.

 정관은 우선 110센티 되는 작은 석고불상을 우리나라 최초로 시험제작하여

 미륵부처님 조성에 대비한다.

 그후 미륵부처님은 차질없이 조성되어 1936년 미륵전에서 점안식을 가지니 

 현재 금산사 미륵전의 그 부처님이시다.

 문제는 거대한 불상을 실내에서 제작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무엇보다도 좌우에 법화림보살과 대묘상보살 두 분 불상이 계시니 더더욱....

 들리는 이야기로는 불상을 여러조각으로 제작하여 조립하는 과정을 거쳤다 한다.

 

- 그런데 이때 금산사와 형제사찰인 법주사도 1939년 미륵불 조성을 발원한다.

 역시 정관이 불상제작을 맡아 고민하던 끝에 야외에 미륵불을 모시자니

 진흙으로 만드는 소조불은 안되겠구 당시 최신 건축재료인 씨멘트를 생각하게 된다.

 정관은 터를 닦고 화강암을 켜켜이 쌓아 뼈대를 만들고 불상제작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불두가 완성되기도 전인 1940년 정관은 이승을 하직한다.

 법주사 씨멘트 미륵불은 우여곡절 끝에 20년도 더 지난 1963년 완성을 보게된다.

 그런대 1988년 갑자기 미륵불에 대한 안전이 우려된다는 여론이 돈다.

 그리구 청동대불을 모셔야 한다는........''

 그래서 씨멘트 미륵불을 철거하는데 안전에는 전~~혀 문제가 없고 

 견고하기가 상상을 초월했다 한다.

 어찌되었든 현재의 청동대불이 완성되고 개금불사까지마무리 하니 

 현재 법주사 미륵불이 바로 그분이시다.

 

- 그렇다면 금산사 미륵불 조성 당시 사전모형으로 제작한

 110센티미터의 작은 미륵부처님은 어디로 가셨을까??

 인연이 닿았던지 신원사 소림원에 불상이 없다는 소식을 전해듣게 된 정관은

 작고 그렇지만 소림원에 선뜻 석고 미륵불상을 내어주었단다.

 그래서 오늘 소림원 대웅전 옆 관음보살도 앞에 계시는 분이 바로 그분이시다.

 

-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 석고를 이용하여 제작한 첫 번째 불상이 소림원 불상이다.

 물론 100년도 되지 않은 불상의 문화재적 가치를 논하는 것은 그렇지만

 조선인으로서 최초로 서양식 조각을 배우고 돌아와 신심을 다해 제작한 불상이니

 그 스토리를 정리하여 후대에 전함은 필요한 것 같다.

 

- 물론 정관이 남긴 작품은 금산사 미륵부처님과 소림원 석고 미륵부처님 등

 손으로 꼽을 만큼 적다는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특히 정관이 제작한 작품이 태평양전쟁의 전쟁물자가 되었고,

 6.25때는 폭격으로 사라졌다는 이야기만 전해진다.

 한국 근대조각의 개척자이며, 독립운동가이자 40세 젊은 나이에 요절한 정관 김복진!

 그의 작품을 만나러 간다.

 

- 신원사 대웅전 오른쪽에 모셔진 작으신 미륵불.....

 백의관음도를 배경으로 두고.......

 8각의 대좌에 복련을 두루하고, 앙련위에 부처님이 서 계시다. 

 불상의 수인은 미륵불의 전형적인 수인인 시무외여원인을 하고 있고

 법의는 통견차림이다.

 육계는 큼지막히 솟아 깨달음의 정도를 말하고 늘어진 법의는 사실감이 넘친다.

 

- 뜻 깊은 이야기를 전해주신 삼우선배님께 감사를 드린다.

 신원사행에는 익산에서 네 분, 전주에서 다섯 분 등 총 9명이 참여했다.

 더운 날씨지만 구도열정을 보여주신 보형행, 소후자, 반야심 등

 글구 익산팀 여러분께 감솨....

 

             혜림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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