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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회상

수덕사 그리고 수덕사

by 혜림의 혜림헌 2011. 4. 12.

 

 

수덕사 그리고 수덕사


답사 ! 밟아서 조사한다지만, 구두 굽이 무엇을 알겠는 가 ? 

그럼에도 답사를 떠난다.

오늘의 답사지는 인물 많기로 이름난 충남 예산에 자리한 수덕사이다.

곁들여 古건축 박물관까지......

 

이중환이 택리지에 내포라 불리 웠던 바로 그 예산이다.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 적에

아~수덕사의 쇠북이 우~운다"

벌써 30년도 더 전에 독실한 불제자이기도

한 송춘희가 불러 히트한 노래 덕에 아직도 나이 지긋한 중년인은

수덕사를 비구니 사찰로 오해하고 있다 하니.......  

참으로 긴 우연이고 긴 인연이다.


30여년 세월은 가슴속에 남 모르게 자리 잡고 있던 그 깊은 사연을,

흐르는 물에 흘려 보내고,

남은 것은 오직 부처님을 향한 구도의 열정과 깊은 사색에 깊이가 더욱 깊어져

지금 쯤은 어느 절, 어느 암자에서

중생(衆生)을 구도(求道)하는 환갑이 가까운 노스님에 되어 있을 법도 한데 말이다.


수덕사(修德寺) 덕숭총림(德崇叢林) !

사전적으로는 잡목이 우거진 숲을 총림이라 했으니

승속을 가림이 없이 사부대중이 함께하여 불법을 구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

사실 총림은 율원(계율), 선원(선정), 강원(경전)을 두루 갖추고

계정혜(戒定慧) 삼학을 닦을 수 있도록 구성된 비교적 큰 규모의 사찰을 이름이니,

우리나라에는 해인사의 해인총림, 송광사의 조계총림, 통도사의 영축총림,

백양사의 고불총림과 오늘 우리가 가고자 하는 수덕사의 덕숭총림 등 5대 총림이 있다.


서해안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답사지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내포가 낳은 인물로 고려의 명장 최영장군, 사육신의 한사람인 성삼문,

말이 필요 없는 이순신 장군, 추사체를 완성한 김정희, 일제에 항거하여

대마도에서 아사(餓死)를 자청한 최익현, 김대건 신부, 윤봉길 의사,

김좌진 장군,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 상록수를 쓴 심훈,

남로당의 우두머리인 박헌영, 만해 한용운,

동서양화를 두루 섭렵한 이응로 화백 등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란다.


수덕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평안함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가야산 줄기가 우리를 맞는다.

부처님의 가피가 가까이 머무는 사하촌은 언제 보아도 활기차고 분주하다.

사하촌 마다는 비슷비슷하여 특장이 없는 듯 하지만, 사실은 나름대로의

특장이 있다.


신원사의 그것은 조용한 듯 하면서도

노점상 닮은 동동주 가게가 절집 앞까지 자리 잡고 있어 소란하며,

갑사의 그것은 고목아래 운치가 있으면서도

가게안의 분위기는 시골마을의 구판장처럼 짜임새가 없어 보인다.

그런가 하면 마곡사의 그것은 교구 본사답게

널찍한 주차장과 현대식 가게가 들어서 있어

사하촌의 아기자기한 맛은 덜한 것이 사실이다.

수덕사의 사하촌은 잘 정리된 가게답지 않게 호객행위가 극심하여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는 절집의 풍광을 무색하게 하고 있다.


사하촌을 지나니 절집 초입을 넓히려는지 공사가 한창이고,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에 달래며 냉이를 팔고 있을 우리의 할머니는 보이지 않은데,

어느덧 일주문에 다다른다.

일주문의 현판은 전면에 "德崇山 修德寺"요, 후면은 "東方第一禪院"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금강문이다.

초서로 갈겨 놓아 알 듯 모를 듯 하지만 안에 계신 두분의

力士는 仁王이라고도 하는 금강역사가 분명하니 이곳이 금강문이렷다.

입을 벌렸으니 아 금강이요, 입을 닫았으니 흠 금강이다.


금강문을 지나면 사천왕문이다.

지국천왕은 비파를, 증장천왕은 칼을,

광목천왕은 용을, 다문천왕은 탑을 들고 있다고 하나

수덕사의 그것과는 다르니 다만 아리송할 뿐이다.

 

누각을 지나 대웅전 뜨락에 서면 최신의 천불천탑이 우리를 반긴다.

천불천탑이라 하니 운주사를 떠올릴지 모르지만

겉으로 보기에 3층 석탑이 분명하며,

탑신속에 999기의 또다른 탑과 천분의 부처님을 모셨다 하니 가히 천불천탑임이 분명하다.

사실 수덕사는 근래 몇 년간의 대대적인 불사로 예스런 맛을 많이 잃었다.

그럼에도 수덕사의 맛을 느끼게 하는 것은 대웅전이 있기 때문이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주심포형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대웅전은

고려시대의 건물로서 건축연대가 1308년으로 명확히 밝혀진 유일한 건물이기도 하니

봉정사의 극락전과 부석사의 무량수전에 이어

오랜 세월을 꿋꿋이 지탱해온 건물로 국보 49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은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이 장중함을 느끼게 한다면,

측면에서는 색다른 감이 있으니 방풍널도 없이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기둥과

보․도리․人자 대공․우미량 등을 직접 볼 수 있는 희열을 맛볼 수 있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시고 있고벽화가 있었다 하나,

있었다는 사실만 전할 뿐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으되, 들보 등에서나마 흔적을 느낄 수 있다.

대웅전 부처님 뒤편에는 1673년에 제작된 괘불이 있으니 가로는 7m가 넘고 세로는 11m나 된단다.

괘불은 원만보신 노사나 부처님을 그린 것으로 그 모습은 야단법석이 펼쳐지는 부처님 오신날에야 친견이 가능하다 하니 아쉬움에 궤만 만져보고 나올 밖에....

괘불을 거는 데는 30여명 장정의 힘이 필요하다 하니 그 크기를 짐작하기 바란다

그럼 글에서 나마 괘불을 걸어보도록 하자.

괘불을 걸기 위해서는 먼저 도르레가 달린 지주 둘을 양쪽 당간에 세워야 한다.

통나무로 된 지주는 길이가 10미터를 넘으므로 도르레가 달린 한쪽 끝에 밧줄을 연결하여

장정 수십명이 달려 들어 여러번에 조금씩 당겨서 세운다.

마치 옛날 목도방식으로 전봇대를 세우 듯,

국기 게양대를 세우듯 하니 미루어 짐작하기 바란다.

세워진 지주는 밧줄로 사방을 연결한 후 말목을 이용하여 단단히 고정시킨다.

두 개의 지주가 세워지면 그 다음은 지주 끝에 달린 도르레에 연결된 줄에

괘불의 가로막대 양 끝을 묶은 후 줄을 당기면 된다.

이때 양쪽에서 보조를 맞춰가며 조금씩 당겨야 괘불이 손상되지 않는다.

 

대웅전을 오른쪽으로 돌아 나서면 백련당 옆에 수덕사 창건과 관련된

수덕각시의 전설이 서려 있는 관음바위가 있다.

관음바위를 지나 오르게 되는 덕숭산은 높이가 500m도 되지 않음에도

깊은 골짜기와 능선의 맛을 아우른다.

 

소림초당을 지나 향운각 관세음보살님께 삼배를 하고 한참을 더 오르면 만공탑이 나온다.

만공탑에는 世界一花, 百艸是佛母, 千思不如一行 등의 글귀가 새겨져 있으니

세계는 한송이 꽃,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부처가 될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천 번 생각하는 것이 한번 실행하는 것만 못하다는 뜻이렷다.

만공스님은 스승 경허선사의 맥을 이어 오늘의 수덕사를 있게 한 분이기도 하다.

경허와 만공선사에게는 곡차로 얼굴에 단청불사를 대신 하였는가 하면,

걸망의 탁발물이 무겁다 하자 지나가는 여인네에게 입맞춤을 한 후 줄행랑을 치는 등

수 많은 일화가 있다하나,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만공탑을 지나 정혜사가 있으니,

정혜사에는 능인선원이 있어 수덕사의 선풍을 진작시키고

더욱이 만공스님께서 금생의 옷을 벗으신 곳이기도 하다.

다만 찾아오는 이가 너무 많아 수행에 방해가 될 것을 염려하여

간판도 떼어버리고 그저 그렇게 있으니 그리 알면 될 일이다.

힘들여 산에 오른 혹자는 도가 산중에 있어야만 도인가를 물으며,

저자거리에서도 한 점 흐트러짐이 없을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근수가 서로 다르니 이르기 전까지는 다만 삼가 함이 옳을 것이다.

골짜기 건너에는 견성암이 있으니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선원으로

수덕사의 여승을 있게 한 그곳 인지도 모를 일이다.

환희대는 “청춘을 불사르고”라는 수필집으로

우리의 가슴을 흔들어 놓았던 일엽스님이 주석 하셨던 비구니 도량이다.

다만 말끔히 단장된 오늘의 모습에서는 가슴에 다가오는 느낌이 없음을 아쉬워 할 뿐이다.

이외에도 수많은 암자가 있어 간직한 이야기는 많으나,

건물마다는 고결함이 부족하니 그리 알고 볼일이다.


수덕사를 나오면서 초가지붕을 한 일주문 옆 수덕여관을 빼놓을 수는 없다.

사실 고암 이응로 화백의 암각화가 있고

당대의 문인․걸사․예인들이 한 번씩 묵어가는 곳이었지만,

알고 보면 근․현세를 사셨던 우리네 어머니의 회한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알다시피 고암은 동서양을 넘나드는 화풍으로 예술혼을 불태웠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본처 박귀희를 버리고

제자 박인경과의 부적절한 관계로 가끔 회자되곤 하였으니.......

(말년은 박인경과 프랑스에서 보냄)


박여사가 멀어져간 남편이 돌아오길 고대하며 한 서린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뜻밖에 그에게 남편을 찾아다 준 이가 있었으니 그가 곧 중앙정보부이다.

중앙정보부는 소위 동백림 사건으로 고암을 데려다 전주교도소에 수감시켰고,

그 와중에 일편단심 옥바리지를 한 이가 바로 고암이 버렸던 조강지처 박귀희 여사인 것이다.

고암은 출옥 이후에도 수덕여관에 머물며 쇠약해진 몸을 추스렸다 하니

박여사의 가슴에 맺힌 회한이 풀리는 계기가 되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회한을 잉태 하는 계기가 되었을까 ?

다만 부질없는 생각에 잠겨본다.

그러나 말년의 박여사는 고암의 출세 길을 막지 않기 위해 협의 해준

이혼수속을 평생의 실수로 알고 후회하며 살았다니 미루어 짐작하기 바란다.


수덕여관 초가지붕은 바로 이러한 어머니의 마음인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돌아오실 그분을 위해 간직해 온 조선 여인의 지극한 순정이

초가지붕을 그대로 간직한 채 가슴을 숯처럼 태우고 있는 것이다.

허름한 수덕여관에 누워서 덕숭산의 솔바람 소리에 귀를 적시면

덧없는 인생살이의 만감이 교차하여 나그네는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잠 못 이룰 나그네를 염려하여

여관을 음식점으로 바꿔 놓았으니 착오는 없어야 할 듯하다.


오는 길에 고건축 박물관에 들렀다.

겉보기에는 짜임새가 없어 보여 다소 황량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나,

전시실에 들어서는 순간 생각이 달라진다.

우선 우리나라 곳곳에 산재된 건축물을 축소모형으로 제작한 그 공력에 감탄하고,

우리나라 건축의 섬세함과 아름다움에 또한 반하게 된다.

그곳에서 만난 도관욱씨는 자칭은 아니나,

풍수나 명리학 그리고 고건축 분야에 상당한 도력이 느껴지는 인물이 아닌가 한다.

 

다만 그는 어처구니 없다의 “어처구니”를

팔작지붕의 추녀마루 위에 앉아 있는 12지신상을 말한다고 설명했는데,

심곡사의 주지스님은 귀로의 차안에서 맷돌의 손잡이를 “어처구니”라 한다고 말씀하신다.

답을 말하면 어처구니는 맷돌의 손잡이가 맞다.


 2003. 3월에 다녀오고 4월에


                              혜림 쓰다.(다음 블로그 혜림헌)

 

※ 일부 사진은 카페 등에서 빌려왔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