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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회상

서산 마애불

by 혜림의 혜림헌 2011. 4. 12.

마음 씻고 마음 연 이야기(서산 마애불, 개심사, 보원사터 記)

개심사는 이름이 있으되 이름 없는 절이다.
적어도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소문을 내지 않았더라면 그때의 고즈넉하고 고요한 산사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터이다.
(사실 그때는 저두 잘 몰랐었겠지만.......)
그러나 무서운 입소문 탓에 멀리서 오는 길손이 끊이질 않는단다.
8월 정토 답사지로 개심사를 택했다. 더불어 서산 마애불과 보원사 터 그리고 해미읍성까지도.......

답사반이 가는 길은 항상 부처님의 가피가 따른다.
불기 2546년 8월 11일 장마가 가시지 않은 잔뜩 찌푸린 날씨가 여행길에는 적합하지 않을 듯 싶으나 바꾸어 생각하면 비구름이 뜨거운 태양을 숨겨주고 있으니 이만한 답사길이 그 어디 있겠는가 ?
군산의 공덕가는 길을 잠시 헛갈렸으나 쭉 뻗은 신작로에는 걸림이 없다.
걸림이 없으니 반식경 만에 서해안고속도로 서산 I.C에 도착한다.
길은 인간이 만들었으되 길을 따라 가는 이 또한 인간이니.......
길이 인간을 속박하고 있는가 아니면 길이 인간에게 자유를 주고 있는가 ?
이치를 따짐은 독화살 맞은 이를 치료하기 보다 화살이 날라온 방향을 추적하는 어리석음이리라.

길 순서에 따라 백제의 미소 서산 마애부처님을 먼저 뵙기로 한다.
저수지 많기로 소문난 충남이라 마애부처님 찾는 길도 고풍저수지를 찾으면 된단다.
고풍저수지 가는 길에는 차량 한 대만 지나갈 수 있는 비좁고 고풍스런 고풍터널이 있다.
가고 오는 길이 하나이니 누군가가 오는 동안 나는 갈 수 없으며, 내가 가는 동안 누군가는 올 수 없다.
우리 내 어린 중생이 가는 길도 또한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중생이 가는 길에 도반이 있다하나 이 또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만 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

저수지 끝머리에서 용현계곡으로 방향을 틀고나니 잠시 후 마애삼존불로 향하는
다리앞 빈터에 차를 맡기고 계단을 오르는 데 장마로 불어난 물이 발등을 넘나든다.
작은 암자에는 관리인이 거주하는 듯 그림이며 붓글씨 등이 진열되어 있고 판매도 하는 듯 하나 별무 관심으로 지나친다.
마애불 가는 길 왼편 작은 바위 위에는 지권인을 한 석불상 한 분이 계신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지나치기 십상이다.
다시 몇 개인가의 계단을 오르자 당우 답지 않은 작은 당우가 나오고 그 안에 마애불이 계신다.

국보 제84호 백제의 미소 서산 마애불 !


사실 이 명호는 후대의 사가들이 붙여준 이름이되 본 모습을 살피건데 불국정토를 염원하는 백제인들이 운산고을 용현계곡 깊숙한 바위 속에 숨어 계시는 석가여래 부처님을 당대의 석공을 동원하여 드러낸 것이리라.
용현골 바위 깊숙히 숨어 계시지 않고 자애로운 미소를 시현하신 석가여래 부처님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깊은 합장 저두로 몇 번을 감사한 후 고개를 들어 그 모습을 살핀다.
중앙에는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합친 통인을 하신 본존 여래께서 벙긋 웃고 계시니 광배의 불꽃이 장엄의 극을 이루고 있다.
오른쪽 보살님은 약합을 들고 계신 듯 천진한 웃음이 어린아이를 연상시키며, 반가 사유(한쪽다리를 반대편 무릎에 올리고 한 손을 뺨에 대는 생각하는 자세)하고 계시는 왼쪽 보살님을 어찌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비견 하겠는가 ?
특히 반가사유상은 7세기 초 삼국의 신앙형태로서 마애불의 조성연대를 추측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단다.
당초에는 마애불을 보호하는 보호각(당우)이 없어 태양을 따라 시시각각 천차만별하는 온화하고 넉넉한 미소를 볼 수 있었다 하나 이제는 볼 수 없다.
다만 자연광을 대신하는 조명시설(대나무에 전구를 매달아 놓은 것임)이 구석에 있으나 관리인의 허락 없이는 사용할 수 없도록 콘센트의 암수를 맞지 않게 해놓고 필요로 하는 이에게 콘센트를 끼워 준다니 그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찌른 관리비법이 심히 가상하다.
아쉽지만 벙긋 웃으시는 모습만으로 만족하고 삼배를 올린다.
시방세계에 항상 계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시방세계에 항상 계신 법보님께 귀의합니다.
시방세계에 항상 계신 승보님께 귀의합니다.

매애부처님을 뒤로하고 향하는 용현계곡 보원사 터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계곡의 깊이나 넓이로 보아 백여호의 호구를 책임져도 될만한 양택명당 이지만 인적이 없다.
대한민국을 가난에서 해방시켰다는 그 잘난 군사정권이 목장 조성을 위하여 고향을 지키며 오순도순 살아가던 주민들의 문전옥답을 강제로 매입하고 내 쫓았기 때문이란다.
임실군 운암면 섬진강 주변에만 실향민(수몰 이주민)이 있는 줄 알았는데 서산시 운산면 용현계곡에도 실향민의 눈물이 점점이 뿌려져 있다니 ! 아 말문이 막힌다.
보원사 ! 아니 보원사 터다.
상구보리하며 하화중생하시는 수십 수백 스님네의 아침 공양을 위하여 씻어대는 쌀뜨물로 희뿌옇게 물들었을 용현계곡은 그 옛날의 자취는 오간 데 없고 그 물이 참으로 덧없이 맑기만 하다.
개울을 사이에 두고 펼쳐진 넓다란 절터는 번성했던 그 옛날을 말없이 말하고 있으나 우리 눈에 보이는 건 "산천은 의구하되 스님은 간데없는" 허물어진 절터의 정취 그뿐이다.
천년을 변함 없이 그 자리를 지켜왔을 당간지주는 보기 드물게 당간을 받치는 간대(杆臺)까지 온전히 남아있는 보물 제103호이다.
수풀사이 깨어져서 안간힘으로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석조(물구유)는 보물 제102호로 길이가 3.5m이고 깊이가 0.9m이니 그 깊은 곳까지 한점 한점 정으로 쪼아냈을 석공의 공력을 생각하니......
개울건너 오층석탑은 보주, 용차, 수연, 보개, 보륜, 앙화, 복발, 노반 등 상륜부는 사라졌으나 찰주는 온전히 남아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넉넉하되 상승감으로 둔중함을 이겨내니 안정감이 있고, 하층 기단면 사자상은 그 얼굴이 각각이니 눈여겨 볼일이며, 상층 기단면의 팔부신중은 특히 서쪽의 아수라 상이 빼어나다. 그래서 인지 보물 제104호란다.
탑이 있으면 금당이 있을 터이나 주춧돌만 덩그라 하고 절터 뒤쪽에 법인국사 부도 비와 부도 탑이 있으니 지리적 어색함으로 볼때 그 시절에도 그 자리에 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법인국사는 고려왕실의 기반을 다진 4대 광종이 국사로 모신분 이니 강성한 고려의 기상이 부도와 부도 비에 그대로 나타난다.
부도 탑은 그 크기가 크고, 조각 또한 화려하니 법인국사의 위치를 알 수 있고 조성기록 또한 확실하니 보물 제105호요, 부도 비의 거북은 억센 발로 땅을 굳건히 딛고 있고 국사의 행적이 소상하니 사료적 가치로도 보물 제106호란다.
그 외에도 보원사터에서는 9.3㎝의 금동여래입상과 2.57m의 철불 두분이 계셨으나 연화좌를 박물관으로 옮겼다 하니 부처님 계실 곳은 아닌 듯하여 그 마음이 평안 하시지는 못할 듯 싶다.

도대체 국보와 보물은 어떻게 지정될까?
사전적 의미는 역사적·학술적·예술적·기술적 가치를 판단하되 제작연대·시대 대표성·우수성·특이성·역사적 인물 관련성 등을 들어 보존가치가 있는 것을 보물이라 하며 그중 으뜸인 것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보로 지정 한단다.
몇호 하는 숫자는 가치중심이 아닌 지정순서에 따라 부여되니 국보 1호가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는 가설은 맞지 않는다 나 ?
아무튼 보원사의 정취를 가슴에 담고 길을 바꾼다.

다음 목적지는 상왕산 개심사다.
묻고 묻기를 반복하여 저수지를 접어드니 오른쪽 산은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 초원으로 변한 삼화목장이다

(지금은 농협 한우개량사업소 이지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한 발짝 옮기니 洗心洞 開心寺 표지석이 우리의 마음을 닦고 또한 마음을 열으란다.

象王이란 코끼리중의 왕을 이름이니 곧 부처님을 이름이요, 부처님을 뵈러하니 마음을 닦고 마음을 열 수 밖에.......
세심동 표지판을 지나니 아름드리 소나무가 좌우를 협시하고 길모퉁이를 돌아서니 연못이다.

 
소담스런 수련이 삐죽이 고개를 내미는 연못의 한 가운데에 외나무다리가 있으니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의

육도를 윤회하는 중생이 심판대에 서서 건너야 하는 다리가 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계단을 오르자마자 한눈에 들어오는 象王山開心寺 전서체 현판이 누각의 규모에 비해 다소 크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나

근대의 명필 김규진이 썼단다.
해탈문을 들어서며 어디선가 눈에 익은 가람의 배치다 했더니 완주군 경천면의 화암사와 너무도 흡사하다.
안양루 앞에서니 대웅보전 현판이 앞에 보이고 왼쪽에는 심검당(尋劍堂)이요 오른쪽에는 무량수각(無量壽閣)이다.

다포형 맞배지붕의 대웅보전은 안에 계신 부처님으로 보아 그냥 대웅전이라 이름이 옳을 것이로되,

품위가 넘치면서도 위압하지 않으며, 억만중생을 포용할 듯 넉넉하면서도 번잡스럽지도 않다.
기와지붕 수막새 위에는 백자연봉이 줄지어져 있으니 살펴볼 일이다.
칼을 찾는 집이 심검당(尋劍堂)이다.
공부방이로되 휘어진 통나무 결을 그대로 살리고 있음은 물론, 기둥하나 서까래 하나부터가 세월의 맛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무량수각(無量壽閣)은 아미타 부처님이 계셔서 무량수각이 아니오며 다만 그 이름이 무량수각이오이다.
그 쓰임새는 스님들이 거처하고 계시니 요사채라 이름 붙이면 될 듯하다.
대웅전에서 바라본 전각의 배치는 정방형이나 조금씩 다른 높낮이로 답답함을 없앴으니 선조들의 슬기가 돋보인다.
무량수각을 지나면 소탈한 명부전이 있다. 남방화주 대원본존 지장보살님께 멸정업진언 옴바라 마니다니 사바하를 염하며

지장대성의 위신력이 함께하기를 축원한다.
개심사에 왔으니 대웅전 동종과 부처님의 영산회상을 그렸다는 높이가 10m를 넘고 넓이만도 6m에 가깝다는 괘불에 관심이 없을 수 없다.
공양주 보살님께 어느 날 괘불을 친견할 수 있는가를 물으니 부처님 오신날만 가능 하단다.
대웅전 후불탱화처럼 투도자(偸盜者)의 손길에 휩싸이지 않으시어 다시 뵈러 올 때까지 평안 하시기를 빌고 또 빌면서 다시 속세를 향한다.

서산에 왔으니 해미읍성을 둘러보아야 할 것이다.
해미읍성은 천주교도의 처형장소로 잘 알려져 있어 순례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단다.
비교적 원형은 잘 보존되어 있으되 성안에 살던 사람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나니 죽어버린 성이 되었고, 이교도를 매달았던 호야(회화나무가 맞음)나무는 철사줄마져 피부 깊숙이 감싸 안은 채 역사의 슬픔을 간직하고 서 있다.
답성놀이가 만병통치하는 운동은 아니라 해도 역사의 발자취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법, 답사반 간에 모처럼 대화의 장이 열린다.
계획된 일정은 마무리 되었으나 해가 서산에 걸리려면 아직도 한식경이다.


정치의 계절을 맞이하여 2대 황제지지인 예산의 남연군 묘를 보았으면 한단다.
지체 없이 車首를 돌려 가는 길을 묻고 또 물으나 아는 이가 없다.
어드메쯤 삼거리가 나타나고 남은들 상여집이 보인다.


사실 남연군 묘를 말하기에 앞서 남은들 상여를 알아야 한다.
남은들 상여는 1847년 조선말 흥선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을 경기도 연천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장할 때(사실은 현재보다 위쪽의 가묘)

사용하던 궁중식 상여로 비록 낡고 해짐이 심하나 상여 전체의 모습과 부속품의 조각 솜씨가 뛰어나

우리나라 고유의 민속을 엿볼 수 있는 문화재이다.
여기서 남은들의 의미를 살펴보자. 상여가 있는 광천의 옛 이름이 나분들 또는 남은들 이라면 쉽게 이해가 된다.
알고 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자고로 알고 볼 일이다.
한가지 더 알고 가자.
대원군 하면 흥선대원군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대원군은 왕의 아버지중 왕이 아니었던 분을 뜻하는 보통명사다.
사실 왕의 아버지는 당연히 왕이어야 하겠지만 역사의 물줄기가 어찌 순리대로만 흐를 것인가.
그럼에도 대원군 하면 흥선대원군으로 알고 있으니 흥선이 차지하는 비중을 알만도 하다.
가야산 자락에 자리잡은 흥선 이하응의 아버지 즉 남연군 묘는 당초 가야사라는 대찰이 소재하였으나

이하응이 불을 질러 강제로 폐사시키고 부친의 체백(體魄)을 이장하였다 한다.
구구한 역사적 사실을 말하기는 그렇고 답사 여행인 만큼 남연군의 묘자리만 살피기로 한다.

어수룩한 콘크리트 포장길을 가다보니 그만 묘를 지나쳐 한참을 더갔다.
간신히 차를 돌려 세우고 묘역에 오르니 문외한의 눈에도 그 자리가 예사롭지 않다.
주산인 가야산 석문봉 줄기는 그렇다 치고, 죄우 용호에 모자람이 없고, 탁 트인 시야는 걸림이 없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문외한의 눈에 비친 모습일 뿐이다.
십악죄는 벗어 났으되 한사람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금당을 파하였으니 악인악과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고,

2대에 걸쳐 천자발복은 하였으되 외양만 천자였을 뿐 지극히 천자답지 못하였으며,

더구나 임금으로서 500년 사직의 종말까지 그저 바라만 보아야 했으니 그들이 말하는 명당이 과연 이것이란 말이던가 ?
앞으로 풍수를 공부하는 이는 혹세무민하지 말 것이며, 지사들은 함부로 점혈하지 말지어다.

법성게의 한 구절이 다시 생각난다.
雨寶益生滿虛空이나 衆生隨器得利益이라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배비가 허공중에 가득하나 중생들은 그 그릇에 따라 이익 됨을 얻느니라.)
양대 천자지지 대명당에서 과유불급(過猶不及)의 공부를 마치고 귀로에 오른다.
불기 2546년 初秋에 혜림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