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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회상

호국사찰 흥국사(興國寺), 샘이 숨어 버린 천은사(泉隱寺)

by 혜림의 혜림헌 2011. 4. 12.

호국사찰 흥국사(興國寺), 샘이 숨어 버린 천은사(泉隱寺)

(참고로 2003년경 쓴 글임당)

사찰 건축은 누구의 작품인가 ?
당대의 스님이었을까 ? 아니면 당대의 유명 건축가였을까 ?
시대상황에 따라 달라졌을 것이지만, 사찰 건축가는 스님이라고 보면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찰이니까.......
따라서 사찰 건축물에는 스님들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고, 스님들의 생각이란 불교적 세계관에 기초한 교리와 깨달음의 세계가 농축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흥국사 그리고 천은사 이야기를 하기 전에 사찰건축에 담긴 불교 사상들을 조금은 정리하고자 한다.

사찰마다 에는 담이 있거나, 문이 있고 개울이 있으니 이는 속세와 불국토의 경계를 나타낸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런데 길을 가로막은 담을 돌아서면 문이 있고 출입처인 문에는 문이 없으며, 소통을 방해하는 개울에는 다리가 있으니, 경계가 있으되 그 경계마다 에는 걸림이 없고 속세와 불국토가 구분되어 있는 듯 하면서도 구분이 없다.

그럼 가람으로 들어가 보자.
처음 만나는 곳이 일주문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천왕문이 있고 금강문이 있다.
불교적인 관점에서 우주는 10개의 존재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아래로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이 있고 그 다음 여섯 번째로 사천왕이나 금강역사 등의 천상의 세계가 있으며, 다시 위로 올라서면 성문, 연각, 보살, 부처님이 계시다.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은 잘 아실 터이고, 불법을 지키는 이를 천인이라 하고,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음의 경지를 이른 이를 성문이라 하며, 인연법에 의해서 깨달음을 얻은 이를 연각이라 하니 벽지불이라고도 하며 보살과 부처의 세계로 나뉘어 진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가 다니는 사찰은 천인이 불법을 외호하는 가운데 성문, 연각, 보살, 부처의 4성계가 입체적으로 형상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깨달음의 세계를 형상화한 가람의 중심은 당연히 금당이다.
금당은 대웅전, 대적광전, 극락전 등이며 부처님을 모신 이들 당우들은 뒤에 전(澱)자가 붙어 있다.
금당이 결정되면 주불전 좌우나 뒤편으로 성문을 모신 관음전, 나한전, 응진전, 명부전, 지장전 등이 배치된다.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채나 선방들은 대개 설선당, 심검당 등 당(堂)자가 붙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도교에서 유래한 북두칠성을 모신 칠성각이나, 천태산에서 홀로 깨달음을 얻으신 나반존자를 모신 독성각, 산신각 등은 각(閣)자가 붙는다.
그 외에도 우화루, 보제루, 안양루 등 루(樓)자가 붙어 있는 당우는 2층 건물로 난간이 있으며, 단층건물은 각(閣)자 항렬을 따른다.
즉 범종루와 범종각을 유심히 살펴보면 알 수 있다(물론 부석사 범종각처럼 2층도 있음)

그렇다면 금당과 법당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무엇일까 ?
여러 가지 설이 있겠으나 불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부처님의 진신인 사리신앙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구산선문을 필두로 선불교가 널리 퍼진 이후에는 법신이 중요시되어 법이 머무르는 곳 즉 법당이라는 명칭이 자연스럽게 붙여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법당의 명칭에서 보듯이 각 종파별로 가람이나 탑 등의 배치방식에 일정부분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으나 사설이 길 것 같이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옛모습이 변해 가는 사찰의 불사에 대해 조금은 못마땅한 감정을 가진 분들이 많을 줄 안다.
세상이 변하니 절 집 풍속 또한 변화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세 살만 먹어도 혼자 자기를 희망하는 요즘 아이들처럼 공부하시는 스님들도 나름대로의 프라이버시를 간직하고 싶기도 할 것이고, 절 집에 들르는 신도들도 예전처럼 야단에 법석을 차리는 것을 즐겨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절 집이니 세월을 거슬러 장작불 피워 공양 짓고, 가마솥에 물을 데워서 소세하시라는 주문은 무리가 아닐까 ?
그럼에도 절 집만 이라도 예전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기를 바라는 깊은 마음은 모두가 같으리라.

사설이 길었다.
온다는 차량은 아니오니 남도 끝자락 흥국사 가는 길이 멀기만 하다.
한시간여 늦은 아홉시 반이 되어서야 길이 열린다.

여수 흥국사 !
그 옛날 여천의 흥국사였으나 3여(여수시, 여천시, 여천군)가 합하여 여수시가 되었으니 여수시 영취산 흥국사이다.
석존께서 부다가야에서 정각을 이루신 후 인도 마갈타국 동쪽에 있는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셨으니 이를 영산회상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양산 통도사와 이곳 흥국사가 자리한 곳을 영취산이라 하니 불국토를 염원하는 간절한 원이 서린 곳임에 틀림이 없다.

스치는 차창마다 에는 봄소식이 완연할진대 구례를 지나니 산수유요, 순천을 지나니 진달래가 지천이다.
그러나 여수에 들어서자 꽃향기 대신 암모니아 비슷한 반갑지 않은 냄새가 진동한다. 벌써 여천공업단지에 들어선 것이다.

흥국사는 이곳 공업단지 옆 영취산에 자리잡고 있다.
매년 4월이면 영취산 진달래 축제를 연다고 하나 아직까지 진달래가 만개한 시기를 맞추지 못하고 이름만 진달래 축제였다고 하니 이 또한 부처님의 뜻은 아닐까 ? 참으로 묘한 일이다.

흥국사는 고려 귀족 사회의 모순으로 문란해졌던 사회 기강과 세속의 잘못된 흐름에 대해 좌표를 설정해 주지 못하던 불교를 비판하고, 정혜 결사(定慧結社)를 통해 승가와 사회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신 보조국사 지눌께서 고려 명종 25년(1195)에 창건한 절이라 한다.
흥국사(興國寺)는 이름 그대로 호국사찰로서 나라를 지킨다는 뜻의 호국(護國)이라는 말이 불법에 맞는가는 차치 하더라도 창건당시 나라가 흥하면 이 절도 흥할 것이라는 흥국의 염원을 담고 있는 절인 것이다.

흥국사 초입 사하촌에는 홍교가 있다.
길이 11.8m, 폭 2.7m의 흥국사 홍교는 1639년에 조성되었으나, 1981년 대홍수로 무너진 후 이듬해 복구되어 현상을 유지하고 있으며 보물 제563호이다.
특히 홍예 중심 머릿돌에서 양쪽 홍예 난간 부분에 귀면상을 조각함으로써 잡귀를 막아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으니 일삼아 걸어 볼 일이다.
홍교를 지나면 일주문이 있고 일주문 옆에 있는 부도밭은 너무나 조촐하여 지나치기 쉽다.
그러나 창건자인 보조국사의 부도를 친견하지 못하고 지나친다면 답사인의 예는 아닐 듯 싶다.
흥국사 대웅전은 1690년 지어진 본전으로 앞면 3칸, 옆면 3칸의 다포형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화려하면서도 간결한 느낌을 준다.
안에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계시며, 특이하게 문수·보현보살이 아닌 자비의 관음보살과 지혜광명의 대세지보살이 좌우에서 협시하고 있다.
또한 고주(부처님 뒤에 있는 높은 기둥) 뒷벽에는 흙벽에 한지를 덧붙여 반가사유의 백의 관음(白衣觀音) 벽화를 모셨다.

흥국사 대웅전을 다른 말로 반야용선(般若龍船)이라고 한다.
이는 중생을 이 고통의 세계로부터 고통 없는 피안(彼岸)의 세계로 건너게 해주는 도구가 배이며, 이 배를 용이 호위하므로 용선이라 한다. 이 용선이 바로 반야(般若), 즉 지혜를 의미하는 것으로 지혜를 깨달아 저 피안에 도달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며 법당은 이러한 지혜로써 중생들을 건진다는 의미를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곳곳에 바다와 배를 표현하고 있다.
대웅전 기단에 바다 속에서 사는 게를, 갑석에 거북이를 나타내어 바다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였으며, 법당 앞에 있는 석등(石燈)도 거북이 등에 올라앉아 있어 이를 뒷바침하고 있다.

흥국사는 많은 문화재가 있는 사찰이지만 특히 탱화를 유심히 볼일이다.
먼저 대웅전 후불탱화는 영산회상도로 1693년 의천(義天), 천신(天信) 두 스님이 "누구에게나 두루 비치어 모든 중생이 다 함께 불도(佛道)를 이루기를 기원합니다."라는 소망을 담아 그렸다 하며 보물 제578호이다.
불화(佛畵)로서는 드물게 보물로 지정된 이 그림은 임진왜란 이후의 불화의 유형으로『법화경』이 지닌 의미를 압축하여 묘사하였는데, 석가여래를 한복판에 크게 배치하였고, 주제를 뚜렷이 살리고자 큰 인물은 자세히, 작은 인물은 약간씩 원근법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이밖에 응진전에는 특이하게도 16분의 나한님이 불화로 모셔져 있으니 나한(羅漢)은 최고의 깨달음 즉 아라한과를 얻은 성자(聖者)를 일컫는 말이다.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기에 응공(應供), 진리와 함께 한다 해서 응진(應眞),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 해서 무학(無學)이라고도 불리운 나한은 부처나 보살 못지 않게 공양 받을 만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응진전에 모셔져 있는 것이다.

응진전을 나와 다시 뒤쪽으로 돌아가면 원통전이 나온다.
이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지붕의 한쪽 면이 입구 구실을 하는 특이한 구조이다. 주심포 건물이면서 기둥 위의 쇠서(소의 혓바닥)같은 장식을 한 다포적 수법이 보이는 등 아름답고 기능적으로도 마루의 넓이를 좁게하는 등 특이한 건물이다.
원통전은 관세음 보살의 자비가 두루 통하고 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관음전이라고도 한다.

원통전 앞에서 증명사진을 촬영하고 나서 새로 들어선 박물관을 관한다.
박물관에는 괘불이 모셔져 있다.
괘불은 사찰에서 영산재(靈山齋)나 수륙재(水陸齋) 등의 큰 행사나 사월 초파일과 같은 대법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법당에서 의식을 치르기 어려워 야외에서 행사를 치를 때 괘도처럼 만들어 걸어 두는 의식용 불화이다.
사실 절 집에 열심을 내는 불자라도 괘불을 친견하기는 쉽지 않아 궤만 만지고 돌아오는 일이 다반사이지만 흥국사의 그것은 박물관에 따로 모셔 두는 가피를 입어 괘불을 친견하게 되었다.
흥국사 괘불은 조선 인조 2년(1624)에 계특대사가 사찰을 중건하면서 제작하게 한 것으로, 가로 7.3m, 세로 11.7m 크기이며 괘불 보관함 역시 길이가 12m가 넘어 우리나라에서 제일 규모가 크다고 한다.
그 모습을 우러르니 노사나부처님(혹은 관세음보살님이라고도 함)께서 이제 막 화폭에서 붓을 뗀 듯 색상이 선명하고 좌우의 대칭이 정확할 뿐만 아니라 균형이 잘 잡힌 모습을 하고 있어 수작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는다.

괘불은 어떻게 모셔질까?
괘불은 주로 비단에 그리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천에도 그렸다 한다. 그리는 방법은 먼저 비단에 송진을 얇게 덧칠한 후 그 위에 불보살님을 그리게 되며, 그림을 그리는 동안 쉬지 않고 다라니를 염하여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위신력을 갖추도록 하며, 그림이 완성되면 맨 마지막에 화기(畵記)를 적는다.
화기에는 제작동기와 제작일자, 그리고 연화질(불화 제작에 참여한 사람), 시주질(불화 조성시 시주한 사람), 산중질(불화 제작당시 사찰에 있던 스님 등의 직책과 명단)등을 적어넣게 된다.
특히 불화는 혼자서 그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연화질에는 증사(불화가 법식에 맞는가를 감독하는 스님), 화주(불화제작시 권선 등 제반 교화를 독려하는 스님), 화사(불화 전문 승려로 화원·화공·용안·경화·양공·불모·금어·편수라고도 하며 대형불화는 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제작), 송주(불화를 그리는 동안 다라니를 독송하는 스님) 등이 기록된다 한다.
흥국사 괘불 뒷면에는「乾隆貳拾肆年己卯四月日全羅道順天府東嶺靈鷲山興國寺掛佛敬成」라는 기록이 있어 1759년 4월에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단다.
박물관 구경을 마치고 절 집을 나선다.
절 집을 나오는 중 길섶에 커다란 바윗돌이 줄지어 있어 자세히 살피니 고인돌이다.
이름하여 고인돌이나 옛 조상들의 죽음의 흔적 즉 무덤이다.
그럼에도 인생의 무상함을 말하지 않고 보존가치가 있는 선사시대 유물 정도로만 인식하니 이 아니 무상한가 ?

흥국사를 나와 천은사를 향한다.
천은사(泉隱寺) ! 뜻을 풀이하니 샘이 숨어 버린 절이다.
천은사는 구례군의 지리산일주도로 입구에 위치한 절로서 유래를 살펴보니 828년(신라 흥덕왕 3년) 덕운조사와 인도의 스님「스루」가 터를 닦고 절을 지어 처음에는 그 이름을 감로사(甘露寺)라 지었다 한다.

절은 사하촌이 없어 말 그대로 호젓하며 그 분위기가 그만이다.
일주문에 이르르니 현판에는 '지리산 천은사(智異山泉隱寺)'글씨가 석자씩 세로 두줄로 씌어 있는데, 그 글씨가 굽이쳐 흐르는 물줄기 같기도 하고 지리산을 휘감아 불어오는 갈바람 같기도 하다.

유래를 들어본다.
경내에 이슬처럼 맑고 차가운 샘이 있어 감로사라 했는데, 이 물을 마시면 흐렸던 정신도 맑아진다 하여 많은 스님들이 몰려들어 한때는 천명이 넘는 스님이 지내기도 했으며, 고려 충렬왕 때에는 '남방 제일 사찰'로 승격되기도 했단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중건할 때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기에 잡아 죽였더니 샘이 솟아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 하여 조선 숙종 4년(1677년)부터 천은사라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상하게도 이름을 바꾼 두부터 원인 모를 화재가 잦고, 재화가 끊이지 않았다 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선 4대 명필의 한사람인 원교 이광사가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물 흐르는 듯한 서체로 써서 걸었더니 이후로는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새벽녘 고요한 시간에는 일주문 현판 글씨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린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일주문 현판에 걸린 여섯 글자가 절의 귀중한 내력을 말없이 말하고 있다.

이른 새벽 천은사 일주문에 귀 기울이고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리라.
지리산의 이름이 되었다는 대지문수사리보살을 친견하리라.

일주문을 지나면 수홍루가 있고 왼편으로 천은지(泉隱池)가 푸르름을 더하고 있다.
수홍루를 지나면 감로수가 솟아오르는 샘물이 있으니 샘천(泉)자를 괜히 사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감로수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보제루가 있다.
단청도 없이 단아한 보제루는 입구에서 보면 2층 건물이지만 절마당에서 보면 단층 건물이다.

보제루(普濟樓)의 현판은 우리고장에 연을 갖고 있는 창암 이삼만의 글씨다.
일찍이 추사 김정희는 참암과 원교(이광사)의 글씨를 가리켜 시골에서 밥은 굶지 않고 살 정도라고 폄하 하였다 하니 그 글씨가 부족함인가 ? 아니면 추사의 인품이 부족함인가 ?
당대의 석학을 평가한다는 것은 그렇고 다만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하였으니 추사가 덜 익었다는 뜻인가 ? 다만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보제루에 앉아 좌우를 살피면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건물의 지붕너머로 지리산 봉우리가 손에 잡힐 듯 들어온다.
건물을 지을 때 우람하고 당당함이 있으면서도 자연을 넘보지 않는 모습에서 절 집의 터를 닦고 설계를 하신 스님들의 넘치지 않는 지혜가 엿보인다.
극락보전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고색은 묻어 나지 않는다.
다만 그 안에 모셔진 아미타불 후불탱화는 보물 제924호로 영조 52년(1776년)에 그려진 것으로 아미타부처님께서 서방정토에서 설법하고 계신 모습이다.
아미타부처님이 수미단 위에 앉아 계시고 좌우로 관음, 세지, 문수, 보현, 지장, 일광, 월광, 미륵 등 8대 보살님과 사천왕, 팔부신중, 십대제자 등 청문중이 둥글게 에워싸고 있으며, 특히 불보살님의 명칭을 기록하고 있어 아미타불화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단다.

지리산 !
대지문수사리보살에서 한 글자씩을 빌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 품이 너무도 깊고 너무도 커서 예로부터 기인 걸사들이 둥지를 틀고 앉아 구도의 열정을 태운 산이라지만 어지러웠던 우리의 근대사에는 또 다른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여·순사건(1948년)때 산동마을 출신의 여걸 백부전이 19살의 어린 나이로 토벌대의 포승에 묶여 처형장으로 끌려가면서 불렀다는 산동애가의 구절을 적으며 답사의 여정을 마무리 한다.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피어 보지 못한 채/ 까마귀 우는 골을 멍든 다리 절며 절며/ 다리머리 들어오는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단 골짝에서 이름 없이 스러졌네.」
「잘 있거라 산동아 산을 안고 나는 간다/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을 맺어 놓고/ 회오리 찬바람에 부모효성 다 못하고/ 다리머리 들어오는 꽃처럼 떨어져서/ 노고단 골짝에서 이름 없이 스러졌네/ 화엄사 종소리야/ 너만은 영원토록 울어 다오」

후에 지리산에서 최후를 마친 빨치산들이 즐겨 불렀다는 산동애가는 지금도 봄이 되면 흐드러지게 피는 산수유와 더불어 산동마을 사람들의 가슴을 적셔 놓는다고 한다.
그 가사가 너무도 처절하여 우리를 슬프게 한다.
나무아미타불 !

불기 2547년 4월
혜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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