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에 수년씩 다니신 분들도 스님들께 물어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님도 아프시냐? 구요?
당근 스님도 아픕니다.
스님도 보통의 우리와 같은 인간이니까요...
석가모니부처님도 또한 아프셨습니다.
열반에 드시기 직전에도 대장장이 춘다가 공양한 음식을 드시고 심하게 아프셨지요.
현대 불교사에 큰 발자국을 남기신 성철스님께서도 가야산 백련암에 계시면서도
치료를 위해 부산 등지를 오고가신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합니다.
스님도 아프십니다.
다만 그 아픔에 끄달려 다니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국사 후원에서 공양을 한 후 무설전에서 기도를 합니다.
무엇을 빌까요???
참으로 빌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만........ 아직도 소원을 말한다는 것이 서먹합니다.
하지만 먼길 오셨으니 모두다 소원성취하시기 바랍니다.
(범종에 새겨진 보상당초문입니다) 가운데 덩굴이 당초문이구요, 좌우 문양이 보상화입니다..
불국사를 나와 석굴암을 오릅니다.
석굴암 가는 길목은 험한 산을 깍아 만들었기 때문에 위험방지를 위한 옹벽이 있습니다.
그 옹벽이 별루 아름답지는 않지만 보상당초문기법을 사용하여 장식을 하였습니다.
사진을 직접 찍었으면 좋으련만 대개의 범종 하대에 보상당초문이 새겨져 있구요.
보상당초문은 보상화(寶相華)와 당초문(唐草紋)을 합한 단어로
보상화는 보배로운 상의 꽃 장식을 말하구요,
당초문이란 당나라시대 유행하던 덩굴모양의 식물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디자인이라고 하면 될까요??
그런데 둘이 함께 사용되기 때문에 그냥 보상당초문이라 한답니다.
주로 범종의 하대나 상대, 접시, 절집의 단청 등 다양하게 사용합니다.
(불국대종 자료사진입니다..)
석굴암 가는 길은 예전에는 고속도로처럼 유료도로로 돈을 받았습니다만....
석굴암 주차장에 도착하면 커다란 범종이 우리를 반깁니다.
현판에는 불국대종각(佛國大鐘閣)이라는 현판이 우리를 반기는데요.
글씨를 쓰신 이가 우리고장의 자랑이기도 한 강암 송성룡 선생이십니다.
글구 강암 선생은 현 전주시 송하진 시장의 선친이시기도 합니다.
(석굴암 일주문입니다)
일주문에서 흙길을 따라 10여분쯤 가면 석굴암입니다.
그 길이 너무나 다감하고 평화로습니다.
급할 것 없이 한번 다녀오신다면..... 멀리 동해를 바라보며 걸으신다면.....
석굴암은 너무나 잘 아시는 지라 설명은 약하구요.
다만 답답한 유리창 속에 갖혀 지내시는 것 같아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연구자료에 의하면 석굴암 부처님의 백호광명은 동해의 대왕암을 향하고 있답니다.
또한 석굴암 부처님이 석가모니불이냐 아미타불이냐 하는 논쟁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부질없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항마촉지인의 수인이나 문수보현 두 협시보살 등의 외형적 형태로는 석가모니부처님이 맞지만
불상을 모신 전후 사정이나 서방정토 극락세계에서 동쪽을 향하고 계신점,
조성당시 유행하던 정토신앙 등을 종합하면 아미타부처님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합니다.
(대왕암입니다)
석굴암을 나와 대왕암을 향합니다.
대왕암 가는 길에 장항리사지 석탑 두기가 위용을 자랑합니다만 그냥 지나칩니다.
토합산을 내려오면 기림사 가는 길과 갈라지는 즈음에 대종천이 있습니다.
대종천(大鐘川)은 그 이름에 깊은 사연이 있습니다.
1238년 몽고가 고려를 침입하면서 황룡사가 불타버립니다.
물론 90여미터에 달하던 거대한 구층탑 역시 무상의 진리만을 남긴 채 사라져갑니다.
이때 황룡사에는 성덕대왕신종(일명 에밀레종) 보다 몇 배 더 큰 종이 있었답니다.
몽고는 이 종을 자기나라로 가져가기 위해 토함산을 넘어 오늘의 대종천에 이르러 종을 배에 싣습니다.
물론 그때의 대종천은 바다와 접한 강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나 불법을 수호하고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동해의 용이 되었던 문무왕이
이를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습니다.
동해 용왕의 조화로 대종을 실은 배는 곧 가라앉아 버립니다.
그 후 비바람이 부는 날이면 대종이 울리는 소리가 뭇 중생들의 마음을 저며옵니다.
그 이후로 하천의 이름이 대종천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몇 년전에도 해녀들이 종을 보았다 하여 발굴작업을 했지만 실패했답니다.
(감은사지 3층석탑입니다)
대왕암은 감은사, 이견대, 만파식적과 따로 설명을 할 수 없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문무왕은 신라를 중심으로 한반도의 질서를 재편하는 통일을 이루게 됩니다.
(모르신다구요???? 할 수 없죠)
하지만 동해를 통하여 끊임없이 침범해오는 왜구는 참으로 성가신 존재였습니다.
특히 소규모로 침탈을 계속하는 그들을 속 시원히 조치할 방도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문무왕은 유언하기를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어서라도 부처님법과 나라를 지켜낼 것이니
자신을 화장하여 동해에 뿌리라”합니다.
문무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신문왕은 유언대로
문무왕을 동해에 장사(화장 후 산골)를 지내니 그곳이 바로 대왕암 부근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시절부터(박통) 대왕암이 문무대왕릉이 됩니다.
한마디로 웃깁니다.
폭압으로 선량한 시민을 고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곳으로 관심을 돌립니다.
그래서 납북어부가 간첩이 되고, 제일동포가 간첩이 된 일이 있었습니다.
간첩이 잡힐 때마다 뉴스를 본 시민들은 북한이 쳐들어올까봐 라면을 사들입니다.
이순신 등 수많은 역사적 인물이 위대한 영웅으로 재탄생되고 그 발자국 마다 시멘트가 발라집니다.
그 와중에 문무왕의 산골처(화장한 재를 뿌린 곳)이던 대왕암은 어느덧 왕릉으로 탈바꿈합니다.
이름 하여 문무대왕릉이 됩니다.
속지 맙시다..... 대왕암을 왕릉으로 불러도 대왕암은 대왕암입니다.
인류 역사에는 수많은 전쟁이 있습니다. 전쟁이 곧 인류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회자되는 전쟁의 이유는 영토문제, 물문제, 석유문제, 자원문제 등 다양합니다만
사실 전쟁의 이면에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잃어버린 민심을 되찾아
자신의 권력을 영원토록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악용되는 것이 더 많습니다.
요즘 정치권에서 말하는 국면 전환용인 것입니다.
전쟁을 하면 지도자의 인기는 올라갑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죽어납니다.
문무대왕의 한결같은 불법수호와 나라를 염려하는 마음은 그 아들 신문왕으로 전해집니다.
신문왕은 대왕암이 바라보이는 곳에 절을 짓고 감은사라 이름 하니
오늘날 절터와 국보 112호로 남아있는 탑만이 지극한 효심을 말없이 전하고 있습니다.
감은사의 금당 아래에는 동해의 용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물길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동해의 용왕이 된 아버지 문무왕이 부처님을 친견하러 다닐 수 있게 한 것인가요??
감은사탑은 사실 별빛 영롱한 밤에 보면 인공적인 조명과 어우러져 또 다른 화엄 연화장 세계를 연출합니다.
기회가 있으면 함 보시기 바랍니다.
(지도에 봉길리해수욕장이 바로 대왕암 입니다)
대왕암을 갈 때면 그냥 감포간다고 합니다만 사실은 감포가 아닙니다.
대왕암에서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조금 가면 감포가 있구요,
도중에 이견대라는 누각도 있습니다.
이견대는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모습을 나타낸 곳이라 하여 누각이 있었는데
역시 박통때 터를 발굴하고 최근에 누각이 다시 복원되었답니다.
그 유래와 상관없이 이견대에서 바라보는 동해의 경치가 참으로 좋습니다.
(이견대 자료사진입니다)
혹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만 가지 파란을 잠재우는 피리라는 뜻입니다만 드라마로도 나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신문왕시절 이견대 부근 바다에서 거북모양의 산이 나타나고 그 위에 대나무가 한그루 있는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가 되더랍니다.
이를 잘라 피리를 만드니 피리소리 들리는 곳에 평화가 깃들어 만파식적인 것입니다.
만파식적은 특이하게 경주 시가지를 벗어나면 그 효험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누가 뚱쳐(?) 갈까봐 그런 소문을 낸 것은 아닌지 괜한 의심을 해봅니다.
대왕암 바닷가에는 전국에서 용왕기도를 올리려는 인파로 일년 내내 북적거립니다.
무속인도 많구요, 요즘에는 절집에서도 많이 찾습니다.
소원을 비는 것은 그 방법이 어떻든 간에 탓할 일이 아닙니다.
모두 다 숭고하고 의미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 소원이 나만을! 내 가족만을! 내 주변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었으면 합니다.
더불어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혜림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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