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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회상

신심 또는 욕심 봉정암 가는 길

by 혜림의 혜림헌 2011. 3. 14.

 

 

신신 또는 욕심 ? 봉정암 가는 길  


적멸(寂滅)이란 무엇인가 ?
번거로움을 떠나 열반(니르바나)에 이른 것을 말함이지만
보통은 세상사의 인연이 다함을 또한 적멸이라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2549년전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구시나가라 사라쌍수 아래에서 인간세계의 인연을 다하시고
열반에 드시자 재가자들이 중심이 되어
인도의 전통방식인 화장(다비)으로 장례를 치릅니다.
장장 7일간에 걸친 다비를 마치자
부처님의 육신은 한줌의 재가 아닌, 온몸이 사리가 되어 남겨지게 되었으며,
평소 부처님을 존경하던 각 나라에서는
부처님의 사리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군대까지 동원하는 등 전쟁 일보 직전에 이릅니다.

이에 거중 조정이 이루어져 사리는 여덟 나라가
공평하게 분배하여 탑을 조성하고 고이 모시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지 300여년이 지난 후
인도에는 최초의 통일국가인 마우리아 왕조의
3대 왕인 아쇼카 왕이 즉위를 합니다.
그는 무자비한 살상을 통해 통일국가의 기반을 확고히 구축하였지만
그때 느낀 전쟁의 참상을 보고나서
전쟁이 아닌 참된 법(다르마)에 의한 정복이 필요함을 역설하면서
동물까지도 살상을 금하게 됩니다.

특히, 아쇼카왕은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와
깨달음을 얻으신 보드가야, 최초로 설법하신 녹야원,
입멸하신 구시나가라 등 4대 성지를 성역화하고
석주(돌기둥)를 세웠으며, 8개의 탑 중 7개를 헐어
8만 4천개의 불탑을 새로 조성하는 등 불교 전파에 온힘을 기울입니다.

이후 불교는 부처님 당시의 기후여건과 비슷한 적도부근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상좌불교가 전파되고,
중국, 한국, 티베트 등 추운지방으로는 대승불교가 전파되어 융성하게 됩니다.

두 종파는 방편을 앞세워 현지의 기후여건과 사회에 융화되어
부처님의 법을 널리 펼쳐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외형적인 차별화가 이뤄집니다.
하지만 변함없는 한 가지가 있었으니 그것은 사리를 신봉하는 것입니다.

인도의 불교가 쇠락해지자 아쇼카왕이 세운 8만4천의 탑에 모셔진 사리는
구법승의 손길에 의해 남방으로, 북방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서기 372년 공식적으로 고구려에 불법이 전해진 이래 우리나라에도
많은 스님들이 당나라 등을 여행하면서 앞 다투어 사리를 들여오게 됩니다.

그중 신라의 자장스님은 7년여간 당나라에서 불법을 닦은 후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의 뇌사리를 전해 받아
봉정암을 비롯한 통도사 등에 모시니 그곳이 바로 적멸보궁(寂滅寶宮)입니다.

적멸보궁에는 부처님의 진신(眞身)인 사리가 모셔져 있기에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으며 부처님이 앉아계셔야 할 자리에는
수미단(쉽게 말해 방석)만 있고 불단 너머로 탑을 볼 수 있도록
창이 설치된 것이 보통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영축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를 5대 적멸보궁이라 하여
참배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5대 적멸보궁은 통도사를 제외하고는 대개가 산중에 자리하여
접근하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만
그중에서도 봉정암은 멀리 설악산 소청봉 아래 해발 1,244m에 위치하여
평생에 한번 참배하기도 쉽지 않은 곳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봉정암을 참배하지 않고는
적멸보궁을 참배하였다고 말하지 말라 합니다만
300회 이상 봉정암을 참배한 보살님이 계시고,
7순 넘어서 수십 번씩이나 봉정암 참배 길에 나서는 분이 있는 걸 보면
어려운 듯 하면서도 또한, 어렵지 않은 곳이 봉정암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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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봉정암을 갑니다.
10월 14일 밤 11시가 넘은 시각 봉정암행 버스가 출발합니다.
다들 처음 본 얼굴이지만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절집의 인사처럼 반가우면서도 무심하게 자리를 잡습니다.
호남고속도로 → 중부고속도로를 지나는 동안 살 풋 든 잠에서 깨어나니
어느덧 홍천입니다.
홍천에서 다시 인제를 거쳐 용대리 매표소에 도착하니 새벽 4시가 넘은 시각이니]
어언 다섯 시간을 달려온 셈입니다.
매표소에서 백담사까지는 7㎞ 정도로 요즘에는
마을버스를 운행하여 단돈 2,000원에 발길을 가볍게 합니다만
버스는 아침 6시가 되어야 운행을 시작하니
찰밥 한 덩이에 김 가루를 묻혀 아침공양을 대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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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이 밝아올 즈음 백담사에 도착하여 신발 끈을 고쳐 매고
발길을 서두르고자 하나 무엇인가 나를 잡는 느낌에 발걸음을 멈춥니다.
저쪽에서 오시는 창엄스님의 발걸음에도 서두르는 기색이 전혀 없습니다.
창엄스님은 오늘 봉정암의 인솔책임을 맡으신 총무스님이십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나누고 몇 걸음을 옮기지 않아
70은 넘었음직한 노 보살님 세분이 저만치 가십니다.
한데 그 발걸음이 가볍지가 않습니다.
노구를 이끌고 평지도 아닌 험로 11㎞길을 어떻게 가실지 걱정이 됩니다.

이것이 인연인가 봅니다.
그 시간 이후 봉정암까지 장장 8시간을 부축하고 또 부축하고,
다 왔노라고 용기를 북돋워 드리면서 모시고 갔습니다.
워낙 느린 걸음이라 제 몸에서는 땀 한 방울 나지 않았습니다.
만나는 분마다 “복 받을 겨”합니다만 괜히 쑥스럽기도 하고
복을 받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한편으로는 인연인가 하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큽니다.

이곳저곳 보고픈 곳도 많고 사진에 담을 곳도 많지만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두 시간여 넘게 걸어온 길이 고작 영시암입니다.
영시암에서는 오고가는 대중들을 위해 강원도 감자를 삶아 보시를 하고 있으나
회심곡 구절처럼“배고픈 이 밥을 주어 아사구제(餓死救濟) 하였는가 ?”
묻는 다면 조금은 해당될 듯하고 맛은 그저 보통입니다.

영시암에서는 쌍폭과 깔딱고개를 거쳐 봉정암을 가는 길과
오세암을 거쳐 봉정암이나 마등령을 가는 길이 갈라집니다.
오세암 길은 계곡길보다 다소 험하고 힘이 드니 참고하셔야 합니다.

영시암을 지나 수렴동 대피소에 도착합니다.
원래 산행이라는 것이 돌부리만 큰 것이 있어도 쉴 곳이라 여기고
자리를 펴는 것이 또한 재미입니다만 수렴동 대피소는 잘 차려진 휴식처입니다.

한걸음 한걸음이 살얼음판이니 이름도 생각하지 못하는 계곡과 폭포 등을 지나
왼편에 용아장성(龍牙長城)의 깍아 지른 절벽의 웅대한 자태도
언제 지나쳤는지 모릅니다.

그저 앞으로 ! 앞으로 ! 전진이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잠시만 고개를 모로 돌리면 그야말로 “왜 설악을 이야기 하는지”
“왜 설악을 찾게 되는지”를 말없이 말하는 절경이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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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언 깔딱고개입니다.
경사 60°의 바위길을 가노라면 숨이 깔딱 넘어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합니다만 오르는 순서를 보면 깔딱고개는 참으로 공평합니다.
나이든 노 보살님이 아무리 느림의 미학을 전개해도
아무도 그를 추월하거나 느리다고 불평을 건네지 못합니다. 추월할 곳이 없으니까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다만 묵묵히 기다리고 뒤를 따를 뿐 !
아니면 모처럼 찾아온 휴식의 기회로 알고 숨고르기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네 인생길도 이처럼 공평하기를 바란다면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인과(因果)의 법칙은 메아리가 되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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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봉정암을 찾는 이유를 생각해봅니다.
힘들여 아니 죽을 힘을 다해 봉정암을 찾는 이들에게 한결같이 하는 말이
그들의 신심이 대단하다고 합니다.
절집을 다니면서 공부라는 것을 조금 하다보니
심심과 욕심의 경계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봅니다.
칠순을 지나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노 보살님이 아픈 다리를 이끌고
죽을 힘을 다해 봉정암에 오릅니다.
그리고 사업하는 자식 사업 번창하고,
시험 보는 아들은 남의 아이를 제끼고 그저 1등 하자고
석가모니 부처님께 빌고, 관세음보살님께 빌고 또 빕니다.
어찌 보면 이는 욕심입니다. 아니 진정 욕심입니다.

하지만 이를 욕심이라 치부하기에는 그 모습이 너무나 성스럽다 할까요 ?
낙엽은 귀근(落葉歸根)이라 문자를 쓰지 않더라도
우리네 인생사도 한줌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깨달은 몇 사람을 빼고는 그 누구도 죽는 그날까지
사실을 알고만 있을 뿐 마음속으로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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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역시 그저 봉정암에 오릅니다.
오르다보니 봉정암입니다.
하지만 그 어느 곳도 발 디딜 틈이 없습니다.
법당은 만원입니다.
숙소는 십만원은 되는 듯합니다.
부처님 뇌사리탑 주변도 오만원은 됩니다.
발길을 돌립니다.
소청, 중청, 그리고 대청봉을 향하여 말입니다.
중청산장에서 대청봉 가는 길은 바람이 거셉니다.
몸이 날아갈 듯 합니다.
군데군데 눈 잣나무는 고개를 숙인 채 납작 엎드려 있습니다.
대청에 오르니 멀리 속초시내와 동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만물상도 보입니다. 설악이 한눈에 펼쳐집니다.

시리도록 푸르른 바다를 보고 있자니 내 마음이 시려옵니다.
고향을 떠나 살다가 추석이면 성묘를 갔습니다.
이십 여리를 걷는 중간에 산허리에 서면
반짝이는 섬진호가 미치도록 나를 슬프게 했습니다.
한참동안 설움을 덜어내지 않고는 발길이 떨어지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와서는 또 다른 무엇이 나를 슬프게 합니다.
고향 아닌 시골마을에는 구순을 바라보는 어머님이 계십니다.
듣기 좋은 말로 시골에 계시는 것이 말동무도 있어 좋다고 합니다만
정말로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그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하는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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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왔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어두워진 봉정암에서 잠자리를 살펴봅니다.
다섯 평 남짓한 방에 삼십여 명이 들어왔으니 다리를 편다는 것은
언감생심 상상도 못할 지경이요, 모두들 쭈그리고 앉아서 잠을 청해야 할 판입니다.
봉정암이 불국토인 것은 틀림이 없지만 잠자리만 놓고 보면
아무리 살펴보아도 지옥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어두워진 시간에도 욕심인지 신심인지 모를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중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으나,
그들 모두를 품에 안으니 이곳이 바로 극락이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
평생에 한번 올라오기 힘들다는 봉정암에 와서까지 잠자리 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저 자신 아무리 좋게 보아도 깨닫지 못한 중생입니다.

저녁 공양이 시작되었습니다만 늘어선 줄은
어느덧 깔딱 고개까지 이어진 듯 합니다.
미역국에 말아진 밥 한 그릇에 오이무침 몇 조각이지만
다시 맛보기 힘든 추억의 공양이며, 천지의 은혜와 만인의 노고가 담긴 공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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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각 도량석이 울려퍼지고
새벽예불이 시작되었건만 역시 발 디딜 틈은 없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리탑을 찾으니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기도에 열심이니
저 역시 한자리를 차지 합니다.
조용히 108배를 마치고 가부좌를 틉니다만 깨닫지 못한 유정중생의
어깨 사이로 칼바람이 스며듭니다.

공양시간이 끝나갈 무렵 예의 미역국 한 사발을 받아드나
잔뜩 게으름을 피운 중생에게 주먹김밥은 언감생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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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어두운 시간 하산길을 생각합니다.
도리로는 함께 올라온 노 보살님을 부축해드려야 합니다만
언제 올 수 있을지 모를 설악산을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 간직한채 고개를 돌립니다.
사리탑에 하직의 예를 올립니다.
그리고 오세암 방향으로 발길을 돌립니다만
눈 앞에는 노보살님의 힘들어 하는 얼굴이 밟힙니다.

다행히 같이 온 젊은 거사분들이 여러분 있으시니
하산 길은 그분들이 도와 주실 것을 믿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오세암 가는 길은 다소 험하기는 하지만 등산하는 맛이 있습니다.
설악의 준봉들을 구경하며 햇살에 반사되는 단풍의 색깔은
곱다 못해 징그러울 정도 입니다만 어느새 오세암에 당도합니다.

오세암의 전설은 너무도 유명하기에 생략하구요.
다만 오세암 관세음보살님의 자태가 너무도 아름다워서리
한참을 바라보다 길을 재촉합니다.

영시암에 도착하여 문수보살님께 가는 길에 드리지 못한 예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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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천천히 수렴동 계곡의 단풍을 음미합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소유하려 합니다.
하지만 내가 바라다본 나무들은 벗어버리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벗어버리니 아름다운 단풍이 들고, 벗어 버리니 거침없이 쌓인 눈에도
작은 가지하나 상하지 아니하고 겨울을 견뎌냅니다.

신심이냐 욕심이냐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2600여 년 전 우리의 본래스승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왕의 지위도, 부귀영화도 모두 버리셨습니다.

깨달음이라는 더 큰 욕심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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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에 이릅니다.
수렴동 계곡의 100번째 못(潭)에 이르러 절을 세웠다는 유래가 있는
백담사에는 독립운동가이며, 소설가이자 시인이셨으며
무엇보다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스님이셨던
만해 한용운님의 체취가 서린 곳입니다.

만해 스님께서 님의침묵을 탈고한 극락보전 앞 화엄당 건물에는
또 다른 인연의 자취가 서리니 그가 바로 전두환 전대통령입니다.

이처럼 얽히고 설킨 인연의 타래를 언제쯤 풀어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찌합니까 ?
애민중생의 관심은 불교유신을 외치던 만해스님보다
민족 앞에 업보를 쌓고 유배생활을 하던 전씨를 향한 관심이 더 큽니다.

그래선지 만해스님 기념관에는 어린아이의 손을 잡은
몇몇 젊은 부모들의 모습만 보일 뿐 발길이 뜸하지만
전씨 내외가 묵었다는 화엄실 앞에는 수군거리는 인파가 끊이질 않으니 말입니다.

백담사를 뒤로하고 마을버스를 기다립니다만
새치기 인파에 세시간씩이나 소비해서야 용대리에 다다릅니다.

용대리에서 홍천까지 또 다시 밀리는 차량을 뚫고 자정이 되어서야
전주에 도착하니 욕심인지 신심인지 모를 백담사 참배 일정의 막을 내립니다.

한 가지 숙제가 있으니 무릎이 시원치 않은 제 미누상보살님도
봉정암 부처님을 친견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를 기다리며.......

상구보리하기에도 바쁜 이때 험준한 설악에서
신심인지 욕심인지 모를 바램을 안고 봉정암을 찾는 중생들의
잠자리를 살피시고, 공양을 준비해 주신 스님과 보살님, 거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부디부디 성불하소서........
나무석가모니불 ! 나무석가모니불 ! 나무석가모니불 !

불기 2549년 10월 멀리 전주에서 혜림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