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사와 인연을 맺은 수많은 스님들의 이름이 전해집니다.
진표율사는 762~766년의 짧은 기간에 대찰의 면모를 완성합니다.
1079년 터만 남은 광교원을 건립한 스님은 혜덕왕사 소현입니다.
임진왜란에서 1천여 승군을 지휘한 승군장은 뇌묵당 처영입니다.
1601~1635년까지 불타버린 전각을 재건한 이는 수문대사입니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대적광전·금강문·미륵전 등을 보수합니다.
1935년 3월 화재로 불타 버린 미륵대불은 공모에서 불모로 선정된 정관 김복진에 의해 1938년 현재의 석고 불상으로 태어납니다.
김복진은 일본 동경대에서 서양조각을 공부한 근대 조각가입니다.
현 금산사는 1961년부터 월주스님과 상좌들의 노력의 결실입니다.
1902년 사역을 지키던 한 스님이 금광업자에게 살해당합니다.
용명당 각민대사는 1846년 전주에서 정석노의 둘째로 태어납니다.
약관의 나이에 영주(현 정우면) 정토사 지진 장노에게 출가합니다.
이후 구한 말 국내외가 매우 혼란할 때 금산사 주지에 취임합니다.
혼란한 시기 모악산 주변의 불법 금광채굴이 금산사를 위협합니다.
1900년에는 금광업자의 채굴공사가 오늘의 절마당까지 이릅니다.
스님은 전라감영과 중앙내장원에 금광업자의 불법성을 진정합니다.
오직 금맥에 눈이 먼 금광업자의 불법행위는 멈추지를 않습니다.
급기야 절 마당을 넘어 방등계단 밑까지 헤집는 횡포를 부립니다.
전라감영에서는 채굴금지 공문만 내릴 뿐 불법에는 눈을 감습니다.
1901년 12월 말 스님은 금광업자의 채굴을 온몸으로 막아섭니다.
금광업자들의 도발이 극심해지고 스님들을 폭행하기까지 합니다.
급기야 1902년 1월 1일 금산사에 모인 금광업자와 용역 깡패들이 스님들을 폭행하는 와중에 각명은 세수 57세로 세연을 다합니다.
이제야 금광업자들의 도발이 잠잠해지고 사찰이 평온을 찾습니다.
용명당 각민스님이 입적하신 잣나무 아래에 작은 비가 세워집니다.
잣나무는 죽어 흙이 되고 스님의 육신도 지수화풍 사대로 흩어집니다.
오늘의 넓은 사역은 스님들의 붉은 선혈이 지켜냈음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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