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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전주동학

동학농민군 입성

by 혜림의 혜림헌 2026. 6. 22.
- 완산칠봉 중턱에 동학농민군전주입성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입성비를 세울 때만 해도 동학혁명군이 아니라 동학농민군입니다.
개인적으로 비의 위치는 조금 그렇다는 생각입니다.
용머리고개나 전주천 싸전다리와 다가교 사이가 제 위치로 보입니다.
현 위치는 수많은 동학농민군을 희생시킨 관군 주둔지로 이해됩니다.
- 양력 1894년 5월 31일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합니다.
동학지도자 전봉준은 조직관리는 뛰어났지만 병법은 조금입니다.
동학군은 전주성을 점령하면서 관군이 진격중임을 인지합니다.
그럼에도 전주성에서 전술적으로 중요한 고지를 비우는 실책을 합니다.
화산, 다가산, 완산, 투구봉에는 단 한 명의 동학군도 배치하지 않습니다.
이후 관군은 다가산, 용두봉, 투구봉 등 요소요소를 점령해 버립니다.
풍남문과 패서문을 드나드는 동학군을 손바닥 드려다 보듯 합니다.
투구봉 높은 곳에서 전주성을 향해 포를 발사합니다.
동학군은 관군의 포성을 듣고서야 실수를 깨닫고 이를 탈환하려 합니다.
전투에서 고지의 수비군은 돌격해오는 공격병이 그야말로 밥입니다.
전봉준은 완산 탈환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전술적으로 역부족입니다.
전봉준 자신도 이때 부상을 당했다고 합니다.
동학군이 수많은 희생자를 남긴 채 완산 탈환을 포기한 이유입니다.
6월 11일 부랴부랴 화약을 맺고 전주성을 내준 이유의 하나입니다.
- 동학은 과거 '란'으로 부르다, 운동이 되고 이제는 혁명이 됩니다.
과연 체제를 뒤엎는 혁명일까 의심하면 공격을 받는 지경입니다.
동학군의 문서 어디에도 임금에 충성하고 다만 탐관오리만 탓합니다.
한마디로 임금은 잘하려 하는데 그 아래 관리들이 잘못한다는 겁니다.
기본 생각부터 이왕조를 뒤엎을 혁명가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동학을 말하면서 전봉준이나 김개남, 손화중 등의 야그가 많습니다.
특히 전봉준은 대장 답게 일본의 심문기록, 판결문, 사진까지 있습니다.
- 매천 황현은 오하기문 즉 '오동나무 아래에서 들은 바를 적습니다.'
매천의 기록은 동학도들의 횡포와 만행, 부도함의 기록이 많습니다.
동학도들은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자금을 모았으니 대상은 뻔합니다.
군기가 엄하지도 않았을 터이니 정황상 못된 짓도 많이 했을 겁니다.
당장 먹을 식량도 없는 이는 빼고, 재산이 있는 자들이 타깃입니다.
피해 당사자가 지역에서 식량을 쌓아 놓고 살 정도의 인물입니다.
매천 자신이 지역의 선비이니 지인급 인물이 피해자였을 것입니다.
동학이 부정적으로 기록된 이유입니다.
- 자신이 우금치 전투에 참가했던 오지영은 1940년 동학사를 냅니다.
동학농민군이 괴멸한 지 45년이 되는 일제강점기입니다.
동학이 천도교로 개명을 하면서 그 역사를 기록한 겁니다.
한마디로 1894년의 기록이 아니라 천도교의 역사가 주가 됩니다.
또한 기일이 너무 경과하고 일제강점기의 때가 묻었달까요?
다른 기록에 없는 노비제 혁파, 과부재가 등이 기록됩니다.
한마디로 원시자료는 아니라는 겁니다.
- 동학의 성격을 말하면서 대원군의 역할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흥선은 동학 지도자들에게 효유문을 보내고, 밀지를 보냅니다.
동학농민군의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증거입니다.
근데 흥선이 나서게 되면 동학농민군의 순수성이 훼손됩니다.
그래서 대원군은 2선에 있었으면 하는게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 요즘 동학에 관한 자료들을 보면서 재미를 느낍니다.
근데 동학이 정치권으로 들어가면 달라집니다.
위대한 혁명을 넘어 3.1운동과 4.19, 5.18의 근원으로 연결합니다.
동학군 지도자의 유골을 밀어내던 이들이 요래 변한겁니다.
동학군의 후손을 찾아 수당을 줍니다.
뭐 나설 위치는 아니고 과유불급이라는 말은 첨언합니다.
비 하나를 본 감상이 너무 길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