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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역사

단종 장릉에 잠들었는가??

by 혜림의 혜림헌 2018. 9. 20.

 

- 장릉과 단종 무엇을 먼저 이야기 해야 할까?

 사실 먼저랄 것이 없다. 장릉이 곧 단종이고 단종이 장릉이기 때문이다.

 

- 근데 먼저 장릉에 설치된 안내비의 오류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더불어 리플릿두.........

 "세조2년(1456)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하자"에서

 "1456년은 세조 원년 "또는 세조 1년"이라야 맞다.

 왜냐하면 1455년은 세조 즉위년이고 다음해인 1456년은 원년 즉 1년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청령포, 영월장릉, 단종역사관 리플릿은 모두 오류가 있다.


- 요즘이야 서기로 통일되어 0000년 하면 되지만 가까운 일본만 해도 연호를 사용한다.

 원리는 간단하다...

 왕실 연호에서 왕위에 오른 해를 즉위년이라 한다.

 자연스럽게 즉위 2년차가 되면 묘호에 1년을 붙인다.....

 즉 단종 즉위 2년차가 단종 1년 또는 단종원년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각 조선왕들의 연호를 더했을 때 자연스럽게 500년 역사의 아귀가 맞는 것이다.  


- 지적질을 시작한 김에

 · 리플릿 "영월장릉"의 1457(세조3)은 세조 2년의 오기이고,

              장릉연혁도 1516년(중종11)은 중종 10년의 오기             

 · 리플릿 "단종역사관" 단종의 생애에도 1457(세조3)은 세조 2년의 오기

 · 리플릿 "청령포" 단종 소개부분도 1457(세조3)은 세조 2년의 오기이다.

 물론 이와 관련 유수의 저작에도 오기가 다수이니 뭐...........

 바로잡기를 바란다...

 한가지 팁을 드린다면 연호보다는 서기년 환산년수를 적용하는 것이 이해가 쉽다는 말씀.......


- 단종은 기록된 대로 1441년 태어나 1457년 세상을 떠나니 그때 우리나이로 17세 어린이였다.

 재위기간은 1452년 5월 부터 1455년 6월까지이다.

 아다시피 단종의 아버지 문종은 자신의 단명(短命)을 예견하고 황보인, 남지, 김종서 등에게

 사후 등극할 어린 왕세자를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한다.  즉 고명한다.

 

- 그러나 부탁한대로 이뤄진다면 그것은 역사가 아니다.

 우선 단종의 삼촌 즉 문종의 동생들이 워낙 드센데다가 나름의 세력마저 강력하다.

 큰삼촌 수양(훗날 세조)은 말할 것도 없고 안평, 금성 등등등

 삼촌들의 입장에서 이씨의 나라인데 고명대신 김종서 등이 종의 유명을 받든답시고

 12살 짜리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황표정치로 인사권과 병권을 쥐고 호령하는 꼴이

 한편으로 두렵기도 하지만 아니꼽기도 하고 성에 차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게다가 삼촌들은 할아버지 세종의 정사에 참여하여 실무도 경험했겠다 권력의 맛도 알았다.

 그 뿐이 아니다...

 할아버지 태종이 호랑이보다 무섭다던 태조 이성계의 권력에 도전하여 빼앗는 과정을 알 터....

 어차피 정권투쟁은 시기의 문제이고, 승패의 문제일 뿐이지 않았을까??

 

- 계유정란의 과정은 사서나 드라마를 통하여 잘 알고 있을 터...... 더는 말하지 않으리!!

 수양의 입장에서 김종서로 대표되는 집권사대부와 사육신, 생육신 등과 단종의 희생은 

 추락한 이씨왕권의 위신을 되살리고 권력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먼저 인간적으로 보아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넋을 위로한다.

 

- 다만 역사적 관점에서, 그리고 일반 백성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권력이 시대정신을 이끌어가지 못하거나, 반대세력을 제압할 만한 힘을 갖지 못했을 경우

 또는 백성들의 삶을 심히 어렵게 만들었을 경우에는 불가피하게 힘의 공백이 생겨난다.

 세상은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 권력의 속성에 따라 또 다른 권력이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게 역사다.

 

-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그냥 백성들의 입장에서

 단종의 치세가 이어졌다면? 세조의 치세보다 백성들의 삶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냥 가정인 것이다.

 다만 가정이라 해도 힘없는 상왕 단종을 그리 죽였어야 했을까????

 하지만 그게 권력의 속성인 것을....    뿌린대로 거두리라....

 

- 사실 조선왕조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긴 500년이나 이어졌다.

 1592년 부터 7년 동안이나 계속된 일본과의 전쟁이 그렇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등

 외세의 침입에 의해 정권이 무너질만한 사유와 기회가 있었지만 무너지지 않았고

 그때마다 국왕 등 핵심지도부가 도성을 버리고 탈출을 감행했음에도 정권이 이어졌으니 말이다.

 어찌보면 불가사의 하다고 할만하다.

  

-  역사가 그러하니 단종은 즉위한지 2년째 되던 1453년 10월 계유정난이 일어나 허수아비가 된다.

 더하여 문종의 3년상이 끝나기도 전인 단종 2년 1454년에는 송현수의 딸과 강제로 결혼을 하게 된다.

 1455년 단종은 그 알량했던 임금의 지위를 수양(세조)에게 넘겨주고 상왕 즉 뒷방신세를 자청한다.

 

- 그런데 1456년 단종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아니면 암묵지처럼 단종을 위한 복위운동이 일어난다.

 사육신 등의 문무신들이 "선비의 의무이며 국가에 충성하는 도리"를 이유로 말이다.

 모의는 김질의 밀고로 실패하고 피바람이 일어난다.

 뒷방에 머물던 상왕 단종은 노산군으로 감봉되어 영월당 청령포로 유배를 명 받으니

 1457년 6월 21일 창덕궁을 나와 동대문 밖 왕심평다리에서 부인 정순왕후 송씨와 영영 이별한다.

 화양정(동대문 화양동)에서 하루를 보내고 광나루에서 배에 올라 오늘의 여주(이포), 원주를 거쳐

 때로는 배를 타고, 때로는 말에 올라 영월고을에 입성하지 않았을까 한다.(유배길은 인터넷 참고)

 

-  충신들의 순수한 의지로 시작된 복위운동이지만 단종에게는 비수로 돌아오니

 단종은 노산군으로, 노산군에서 다시 서인으로 강봉되었다가 1457년 10월 죽임을 당한다.

 단종에 충성하고 선비의 의무, 인간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계획되었던 단종복위 시도는

 단종을 죽음으로 몰았으니 이 아이러니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것인가?

 

- 단종의 주검은 동강에 버려지고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거두지를 못하나 

 호장 엄홍도가 을지산 현재의 장릉에 암장한다.

 그렇게 강제로 잊혀지던 장릉은 59년이 지나 중종 때인  1516년 지역인사들의 증언으로 묘를 찾고

 그해 12월 처음으로 치제를 올리게 된다.

 당시의 묘는 봉분이 낮고 초라하기 이를데 없지 않았을까??

 

- 그러나 세조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어가던 시절이 계속되니 노산군의 복권은 쉬 이뤄지지 않는다.

 선조때인 1580년이 되어서야 상석, 표석, 장명등을 세우는 등 묘역을 정비하여 모양을 갖춘다.

 그로부터 다시 120년 세월이 될즈음 숙종때인 1698년 노산군에서 복권되어 단종이라는 묘호를 얻고

 종묘에 배향되게 되니 노산군 묘 역시 장릉으로 복권되어 오늘에 이른다. 

 

- 왕릉은 능원묘(陵園墓)로 구분되니 능은 왕과 왕비 에 더해 추존왕과 비를 합하면 78기

 원은 왕세자나 그의 비, 왕을 낳은 후궁 무덤으로 효령원이니 하는 것으로 13기,

 묘는 왕자나 대군 등 왕족의 무덤으로 52기가 있으니 양녕대군 묘, 연산군 묘, 광해군 묘 등이다.

 

- 장릉은 다른 왕릉과 달리 강원도땅 영월읍에 자리한다.

 장릉 영역은 단종역사관을 포함하여 장릉과 수복청, 정자각 등 부속시설로 나뉜다

 능 관람의 순서대로 한다면 금천교, 홍살문, 신도, 정자각, 혼유석 등 각종 석물, 봉분, 곡장 등으로

 이어지겠지만 장릉은 능의 주인을 닮아 파란만장한 모습이니 이쯤 이해가 필요하다.

 

- 먼저 오솔길을 따라 능역을 살펴 본다.

 

- 곡장이 둘러진 장릉 봉분에는 난간석과 둘레석이 없다.

  석물이라야 석양과 망주석, 문인석, 석마, 혼유석과 장명등이 있을 뿐이다.

 

- 다시 왕릉 초입이라 할 수있는 홍살문이다.

 능역 전체로 보면 홍살문 이전에 금천교가 있어야 하지만 닥히 금천교라 부를 만한 것은 없다.

 홍살문 지나 오른쪽에 장방형의 판위가 있고 참도는 신도와 어도를 구분한다.

 특히 참도는 현지 지형에 맞게 ㄱ자로 구불어져 있음은 험난한 장릉의 역사를 설명한다. 

 

- 왕릉에는 참도 이외에 판위, 소대(예감), 망료위 등의 석물이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놓여진다.

 판위는 제관 대기장소, 소대 또는 소전대는 축문을 태우는 곳이다.

 해석이 다르지만 망료위는 축문을 태우기전 놓는 곳 또 일설은 화재 감시장소라고도 한다.

 참도 오른쪽 비각에는 "조선국 단종대왕릉"이라 붉은글씨를 새긴 비가 있다.

 

- 장릉 영천 즉 신령스러운 샘이다.

 아마 제사를 모실때 사용하던 우물이 아닌가 싶다.

 

- 난세의 영웅, 치세의 간웅이라 했다.

 나라가 어지러워야 충신이 태어난다.... 고로 충신이 많은 세상은 좋은 세상은 아니다.

 그 죽음이 참혹하고 안타까가웠던 만큼이나 단종 주변에는 충신이 많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중에서 단종의 시신을 거둔 엄홍도는 물론 금성대군, 그외 환관, 궁녀, 계유정난 피해자, 사육신 등

 단종복위운동 희생자 등등등이 많고도 많으니 그들을 기리는 단을 만든 것이다.

 배식단(配食壇)에는 환관 44, 궁녀등 여인 6, 선비 186인 등 268명의 영령을 모시고

 매년 한식에 제를 지낸다고 한다.

 

- 배식단 외에도 엄홍도와 박충원을 기리는 정려각도 따로 지었으니 그 의미를 생각하시길....... 

 

- 나무는 역사다.

 장릉을 장식하는 느릅나무다.

 

- 왕이 될 팔자는 아니어도 단종역사관 일월오봉도 앞에서 왕을 흉내내다.

 

- 인생 이야기에도 가정은 없다.

 단종의 17년 생애중 세상물정을 알아갈 나이인 12세부터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그를 도와줄 피붙이인 부모(문종 부부)는 세상에 없고 12살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왕이 되었으니

 세상의 물줄기를 돌릴만한 힘이 없었던 왕권은 그저 천근의 무게로 그의 생명을 위협한 것이다.

 

- 즐겨 독송하는 법성게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보익생만허공 중생수기득이익(雨寶益生滿虛空 衆生受器得利益)이라..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배로운 비는 허공중에 가득하나

 중생들은 각기 가진 그릇의 크기만큼 이익을 얻느니라..........

 단종대왕님!!  당신이 가진 그릇의 크기가 왕권을 담기엔 너무 컸나?????

 

         혜림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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