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좋은우리절 제36차 가람순례단이 법보종찰 해인사를 갑니다.
해인사!! 그 이름만 들어도 웬지 모를 감동이 있는 절집입니다.
- 고려대장경!! 흔히 팔만대장경이라 합니다만
최초의 한문대장경은 중국 송나라 때 만들어 졌구요.
고려에서는 8대 현종때인 1011년 거란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극복하고자
대장경 조조에 착수하여 18년만인 1029년에 완성하니 이를 초조대장경이라 합니다.
이는 송나라본을 그대로 복각한 것이라 합니다.
복각 장소는 대구 팔공산 부인사구요, 현재는 동화사 말사로 비구니 사찰입니다.
근데 이를 어쩝니까?? 1232년 몽고군의 2차 칩입으로 불에 타버립니다.
- 이후 속장경을 간행하기도 합니다만 이 역시 불에 타버리고
고려라는 나라는 최씨 무인정권 아래에 놓인채 왕실은 허수아비구요,
몽고의 침입에 맞서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최우 등은 결사항전을 외치는 한편
부처님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1236년(고종 23)
강화도에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대장경 간행을 시작하여
15년만인 1251년 9월 완성하니 현재의 팔만대장경이 탄생하는 순간이지요.
그 수는 1,516종에 6,815권, 경판의 수는 81,258매랍니다.
그렇게 탄생한 고려대장경은 1천 가까운 시간을 지내는 동안
해인사의 보물이 되었고, 한국의 보물이요, 세계의 보물이 된 것입니다.
- 그 해인사를 찾아가는 길은 고은 최치원이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는 홍류동의 붉은 계곡을 지나야 합니다. 홍류동 계곡마다에는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은 흔적이 있다하나 길이 바쁘니.....
(홍류동 계곡입니다)
- 홍류동에는 최치원의 글씨가 있다하나 실증사학의 관점에서 진품이라 할 수는 없구
다만 고운은 왜 홍류동의 신선이 되었을까요??
당에 유학하여 황소의 난을 평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토황소격문을 지을 정도로
잘 나가는 당나라 관리가 된 고운이 신라로 귀국을 하였습니다만
아마도 당시의 정국은 고운의 위대한 뜻을 받아들일 만 한 준비가 없었나 봅니다.
그러니 은둔을 택하였겠지요.
즉 시대가 천재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지요.... 혹 당신도?? (해인사 비림)
- 해인사의 역사를 말하는 비석들입니다.
- 비림 못미처 큰 스님네들의 부도와 부도비가 있습니다.
(성철스님 부도)
- 너무나 크신 분이니 따루 설명하기는 그렇구요....
(자운스님의 부도와 비)
- 자운스님은 성철스님과 동 시대를 사신 대 율사이십니다.
현 조계종의 각종 계율을 정리하는데 큰 역할을 하셨다지요.
즉 스님의 복식에서부터 각종 의식과 전각의 배치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인 율장의 예에 따라 여법하게 해석하고 정리하셨다 합니다.
팔각 원당형 기단 위에 원형 탑신으로, 옥개석과 상륜부 등이 아주 웅장합니다.
(혜암스님 부도와 비)
- 성철스님 열반 후 다음번 종정이신 혜암스님이십니다.
조선시대에 유행한 종형 부도로 간결하면서도 위엄이 있습니다.
상하 기단에는 안상을 조각하구, 특히 상대기단에는 해태(사자?)를 배치하여
스님을 위호하도록 하였군요.
(동곡당 일타스님 부도와 비)
- 일타스님은 일가족 41명이 출가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만
(출가 이야기는 책으로 한권을 써도 모자랄 판입니다)
글씨 면 글씨, 글 이면 글, 그림이면 그림 등 뭐 하나 모자란 것이 없었다는군요.
그 손재주가 수행에 방해된다 하여 손가락을 태우는 연비를 감행하셨다 합니다.
법문하실 때의 그 낭랑하신 목소리는 지금 들어도 신심이 증장됩니다.
검박하신 스님의 일상을 닮아 멋 없는 멋을 지닌 부도를 꾸몄군요...
(왼쪽이 영암당 임성스님, 글구 명진스님 부도와 비입니다)
- 영암당 임성스님은 현 서울의 봉은사를 지키는데 많은 노력을 하셨구요.
해인사 주지와 총무원장도 역임하셨다 합니다.
봉은사에 부도를 모셨는데요..
아마 사리를 나누어 해인사에도 봉안한 것으로 보입니다.
스님께서는 돈 주머니도 공용과 사용으로 둘을 만들어 사용하실 정도로
삼보정재를 사용하는 데 공과 사가 분명하셨다 합니다.
- 곁의 명진스님은 영암스님의 상좌로 그 스승에 그 제자였다고 하며
61과의 사리를 수습하여 모셨다는 군요......
(길상탑)
- 묘 길상탑 또는 길상탑이라 하는데요...
해인사 길목에 이름 없이 서 있었습니다만
1966년 도굴꾼을 잡아 진술을 들으니 바로 이 탑을 도굴 하였더랍니다.
그들이 도굴한 지석 등을 회수하여 기록을 살펴보니
신라말에 해인사에서 돌아가신 56분의 스님(승군)을 추모하는 내용 이었답니다.
그리하야 길상탑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구요....
어찌 되었던 참으로 묘오한 인연입니다.
도둑이 탑의 이름을 얻게 해주다니요...
상하 2중 기단위에 3층으로 된 석탑은 전형적인 신라탑의 모양을 하고 있지요.
신라탑은 2중 기단을 하고, 옥개석의 넓이가 기단석 보다 좁은 것이 특징이지요.
(백제 탑은 1층 옥개석이 기단석보다 넓구요)
보물 1242호랍니다.
(해인사 영지입니다)
- 뭐 내려오는 여러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그림자가 비추니 영지(影池)이겠지요??
그러나 여러번 해인사를 가 보았지만 한 번도 맑은 물은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숲에서 나오는 특유의 성분이 미치는 영향이 아닌가 합니다.
(해인사 당간지주)
- 잘 생긴 석조물을 만나는 것은 가람을 찾는 또 다른 재미입니다.
절집의 행사를 알리는 깃발(당)을 달던 간대를 세우던 기둥입니다.
(해인사 일주문)
- 해강 김규진 선생이 쓴 해인사 현판이구요.
사바세계에서 일주문을 지나니 부처님 세계가 펼쳐지는 군요....
다만 경계를 가르는 문이 없으니 사바세계와 부처님 세계가 다름이 무엇이리요??
(일주문에서 봉황문에 이르는 인파)
- 참으로 많은 이 들이 해인사를 찾고 있습니다.
속진번뇌를 씻는 뜻 깊은 시간이 되시길.......
(해인사 고목)
- 해동화엄 종주이신 의상스님의 손상좌이자 해인사 창건주이신
순응스님의 지팡이가 천년을 지나면서 그 명을 다했답니다.
1945년 그야말로 고목이 쓰러졌다는 군요.
(해인사 봉황문)
- 해인사 봉황문(천왕문)입니다.
사천왕은 그림으로 모셔져 있구요........
정면에는 해인사 사격을 나타내는 "해인총림"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국사단과 모셔진 탱화)
- 한글 이름만 대면 큰 스님을 모신 전각으로 오해 할 수 있습니다만
국사단(局司壇)이니 산신각 정도로 이해하시면???
가야산과 해인사를 지키는 가야산 국사대신 정견모주(正見母主)를 모신 전각입니다.
당연히 가야국과 관련이 있지만 그 이야기는 담에.......
정견모주라?? 풀이하면 바른 깨달음의 어머니 정도???
전에는 "국사대신 정견모주"라는 위패 비슷한 것을 모셨었는데요.
현재는 탱화로 대체되었답니다.
(구광루)
- 해인사는 산지가람입니다. 즉 경사진 산비탈을 깍고 채워 세운 절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경사가 급하기도 하고 계단과 석축이 유난히 많습니다. 구광루는 해동원종대가람이라는 해탈문을 옆에 끼고 있습니다. 전시관, 판매장 등으로 사용하고 있지요. (대적광전과 정중3층탑, 석등입니다)
- 대적광전은 1818년 지어진 정면 5칸, 측면 4칸 총 20칸의 대형 전각입니다. 사방에는 정면 대적광전, 글구 법보단, 대웅보전, 금강계단 등 4개의 편액이 있지요. 안에는 청정한 법을 상징하는 대일여래 즉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구요. 좌우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하고 계십니다. 해인사가 화엄종 사찰이고 또한 화엄십찰의 하나이니 당연히 중심 법당입니다. 다만 행사관계로 각종 번이 늘어져 있어 사진발은 좀....... (정중3층탑과 석등입니다)
- 정중탑은 대적광전 뜰 아래 있는데요....
9세기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사찰의 정 중앙에 자리잡아 정중탑이라고도 하지요.
난간을 두르고 배례석을 설치하여 신라탑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구요,
일부는 떨어져 나갔지만 옥개석 끝에 풍탁이 달려 있기도 합니다.
- 앞의 석등은 부처님이 비추는 광명을 상징하는 가 하면,
불법을 밝게 비추는 등불이기도 합니다.
탑과 동시대에 조성된 것이라 합니다.
다만 석등의 간주석은 팔각 간주석이나 고복형으로 설계되는게 보통이지만
그 형식면에서 조금 특이하구요.....
불을 피우던 화사석은 팔각으로 사면에 화창을 내고
나머지 중간 사면에는 사천왕을 조각하였습니다.
(노주석 또는 정료대)
- 오늘로 치면 보안등 정도로 할까요??
절집에 행사가 있을 시 밝혀주던 정료대입니다. 노주석이라고도 하지요
아 한문으로는 정료대(庭燎臺), 노주석(爐柱石)으로 씁니다...
호랑이 등 짐승들의 출현을 막고 각종 행사시 절집을 밝히던 시설로
순 우리말로는 불우리라고 합니다.
보지는 못했지만 관솔 등으로 불을 피웠다 하는 군요.....
(대비로전)
- 2005년경 법보전과 대적광전에 계시던 비로자나부처님의 개금을 추진하던 중
서기 883년에 진성여왕이 대각간(총리쯤) 위홍을 생각하며 조성한 것이라는 명문이
발견되어 국내 최고의 목조 쌍 비로자나불로 확인이 되었답니다.
이후 개금을 하고 화재나 지진 발생시 지하 6미터 아래로 피난하실 수 있도록
첨단 설계된 건물을 지어 봉안하니 이게 바로 2007년 건축된 대비로전입니다.
(명부전)
- 명부전은 대적광전 옆에 있지요.
명부는 사후세계입니다.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무독귀왕, 글구 시왕이 있지요.
(응진전)
- 응진전 또는 나한전이라 하지요??
쉽게 말해 부처님의 제자인 아라한을 모신 전각??
(전각의 기와지붕입니다)
-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계 건축양식 중 치미라는 것이 있습니다.
용마루 양 끝에 봉황의 날개(?)처럼 생긴 장식을 말하지요.
흡사 인디언의 깃털 장식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는 군요.
길상과 벽사의 의미가 있다는데요....
조선시대에는 사라졌습니다만 요사이 치미장식을 하는 건물이 많더군요.
또한 추녀마루를 장식하는 용면 또는 귀면형태의 기와도 있구요...
어찌되었던 부처님 계신 전각을 장엄하고 삿된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지붕 하나에도 나름의?????
(장경판전)
- 해인사 고려대장경은 법보전과 수다라전 글구 동서 사간전에 보관됩니다.
법보전과 수다라전은 각기 정면 15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었구요
글다보니 법보전과 수다라전의 기둥은 각각 48개씩 총 96개가 된답니다.
또한 동서 사간전은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각기 6개씩 총 기둥이 12개랍니다.
그리하여 법보전과 수다라전 글구 동서 사간전 기둥을 합하면 108개 라는 데요.
아니 그렇게 깊은 뜻이??
법보전과 수다라전에는 81,258매의 국간판(國刊版) 대장경이 보관되고 있구요.
동서 사간전에는 자체 제작한 사간판(寺刊版) 경판을 보관하고 있답니다.
즉 국간판이라 함은 대장도감에서 판각한 팔만대장경을 말하구요
사간판이라 함은 사찰 등에서 자체 제작한 경판을 말합니다.
장경각은 상하 2개의 살창을 내어 자연통풍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거이 두 창의 크기를 다르게 하여 그 과학성이 아주 거시기 하답니다.
- 1973년경 대통령이 해인사를 둘러보고 허름한(??) 장경각에 국보를 보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하여 엄명을 내리니 1975년 최신식 콘크리트로 장경각을 건축합니다.
근데 이거이 습기가 생기고 결로에 이르는 등 문제가 되어 방치하다가
1983년이 되어서야 선원으로 사용하게 되었답니다.
선조들의 지혜를 잘못 우습게 안 것이지요.
(수미정상탑)
- 장경각 뒤편 담장 너머에 수미정상탑이 있습니다.
수미정상탑은 당초 커다란 바위가 있었습니다만 근래에 탑을 조성하였다는 군요.
(독성각)
- 육모지붕 형태의 독성각에는 독성 즉 나반존자가 모셔져 있구요.
(학사대 전나무)
- 아 처음에는 느티나무인줄 착각하였습니다.
전나무도 이런 형태로 자랄 수 있다는 것이.......
학사대는 고운 최치원(857~?)이 은거하던 곳으로 그의 지팡이??
(보경당 기도)
(동참 아그들)
- 기도보다는 역쉬 스마트폰이 제일이죠.....
(스님의 사자후)
- 해인사의 사명이 만들어진 해인삼매란 무엇일까?? 비 오는 날 해가 보이지 않는다 하여 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만히 있는 해를 지나가는 구름이 덮은 거지요. 구름이 걷히면 해는 저절로 드러나게 됩니다. 바다는 가만히 있습니다. 모든 것을 품은 채... 다만 바람이 파도를 일으킬 뿐....... 바람이 자고 잔잔해진 바다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존재의 실상) 비춥니다. 마치 도장을 찍은 것처럼 말이지요. 그 경지가 바로 해인삼매(海印三昧)인 것입니다.
- 뭐 글로써 이런 이야기를 적은 들 얼마나 이해가 갈까요?? 뭐 걱정이 많습니다. 아이 공부 안해 걱정, 돈 없어 걱정, 승진 안돼 걱정, 못생겨서 걱정 등등등 근데 아이 공부 잘하면 행복??, 돈 있으면 행복??, 승진하면 행복??, 잘생기면 행복?? 그 사람에게 물어 보았수?? 행복하냐고?? 그래 행복 하답디까?? 뭐 잠시동안 행복할 수도 있겠지요.
(대장경 천년축전장)
(대장경판 인쇄과정)
- 베어낸 나무는 진을 빼고 건조하여 자른 후 면을 고르게 대패질합니다.
- 닥나무를 가공하여 한지를 생산합니다.
- 한지에 대장경을 필사 합니다. 글구 교정도 하겠지요??
- 필사한 대장경을 뒤집어 목판에 붙인 후 양각을 시작합니다.
- 새겨진 경판에 옻칠을 하고 말린 후 한지에 인쇄를 합니다.
- 인쇄된 경전을 책으로 정리합니다. 끝
(대장경 이운)
(대장경의 각종 기록)
- 대장경은 총 81,258매로 가로로 나열하면 56,880m,
쌓아놓으면 백두산보다 높은 3,200m, 글자 수는 5천2백3십만자,
총 무게는 280톤, 경판을 만드는데 16년, 번역하는데 36년이 걸렸답니다.
와 대단해요.......
(이모저모)
- 사실 기록은 좋은거지요.
우리나라 금속활자가 독일보다 200년이나 앞섰다 하지만 그 활자를 이용하여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였던가요??
한글을 창제하여 백성들에게 돌려주었던가요??
되레 백성들이 글을 알면 통치하기 어렵다 하여 백성이 문맹되기를 바라지 않았나요?
절집에서도 혹 신도들이 공부하면 알음알이가 생긴다 하여 걱정하지는 않으신가요?
사실 알음알이는 불교의 힘입니다.
불자들도 제발 알음알이를 낼 만큼이라도 알았으면 합니다.
- 해인사를 다녀오며 느낀 결론입니다.
팔만사천의 법문이 혹여 빨래판 속에 갖혀있지 않기를 ......
혜림 쓰다.
* 사실 어줍지 않은 지식으로 대중을 안내한다는 것이 쉽지않지요.
더하여 사진 스케치까지 하다 보니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만...
더구나 비님까지 오셔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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