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석사를 떠난 발길이 봉정사를 향합니다.
전주에서 출발하여 경북 북부지역 사찰을 2곳이나 순레하는 것은 무리??
봉정사가 어느곳 입니까?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이라는 영화 촬영지?
극락전이라는 한국 최고(最古)의 목조 건축물을 간직하고 있는 곳?
영국의 엘리자베드 여왕이 발길을 옮긴 곳?
다 맞는 말입니다.
근데 영국의 여왕님은 하필 깊은 산속 봉정사까지 발걸음을 했을까요?
사실 여왕께서 봉정사를 찾은 것은 고려시대 극락전, 조선초기 대웅전,
조선중후기의 화엄강당과 고금당, 만세루 등 목조건축의 변화를
한 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답니다.
- 절 입구에 절집이야기가 아닌 영화 표지석이 반기는 군요.
- 3시간 이나 되는 상영시간은 물론
조명, 촬영, 편집을 혼자 감당해 낸 배용균 감독의 집념어린 노력의 결과로
깊은 산중의 퇴락한 한 암자에서
젊은 수도승과 노스님, 그리고 동자승이
진리를 향한 구도의 여정에서 속세의 번뇌와 다투는 과정들을
멈춰버린 듯한 화면에 담아낸 영화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구요.
바로 이 영화의 촬영지가 봉정사 옆 산내암자인 영산암이랍니다.
- 절집 가는 길에 만난 명옥대입니다.
-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십니까??
산길 옆 개울가에 자리잡아 개울물 소리가 옥구슬 흘러가는 것처럼.......
퇴계선생이 개명한 거랍니다.
(봉정사 일주문)
- 부석사에 계시던 의상스님께서 종이로 접은 봉황을 날리니 멀리멀리 날더라.
살포시 내려 앉은 곳에 절을 세우니 그 곳이 바로 봉정사라는 얘기도 전한다.
다포식의 맞배지붕에 X자 보조기둥을 세워 안정감을 더했다.
(봉정사 해설사님)
- 지긋하신 여 해설사님의 입담은 그저 보통이다.
그러나 열심히 들어줌은 청중의 도리이니.......
(절을 지키는 소나무와 만세루)
- 절 입구에는 몇 그루의 굽은 소나무가 절을 지킨다 하며 서 있군요.
봉정사 만세루 앞에서 절집을 위호하는 굽은 소나무입니다.
만세루는 덕휘루라는 이름이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만세루로 부른답니다.
조선 숙종때 지어진 건물이니 18세기 초쯤이 아닐까 합니다.
봉정사 古 건물중 가장 최근에 지어진 거랍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만세루의 누하주는 투박하면서도 굵은 나무구요.
누상주는 조금은 가늘지만 반듯한 나무를 사용하였군요.
용도는 법고나 범종을 두던 범종루 였으나 현재는 비어있지요.
*누하주는 1층 기둥, 누상주는 2층 기둥을 말함....
(대웅전)
- 만세루 루하에서 본 대웅전의 모습과 기념촬영?
국보 311호인 대웅전은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고색이 창연하다 할까요??
언뜻 보아서는 극락전 보다도 훨씬 오래된 건물로 보입니다.
적당히 바랜 단청과 투박한 공포, 들창을 매달던 걸쇠 등에서
연륜이 우러나는 데요... 조선 초기 건물이라 한답니다.
특이한 것은 중북부지방 사찰 일부에서 보이는 것입니다만
대웅전 앞에 툇마루를 설치하고 난간을 둘렀다는 것입니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 지장 양 보살이 협시합니다.
한가지 더 석가모니부처님을 장엄하는 닷집은 천장을 움푹하게 만들어
탑의 보개처럼 장식하였으니 관심있게 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한국 最古의 목조건축물 극락전)
-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과 주심포(柱心包)식 고려시대 건물이지요.
그러나 현재의 모습은 말쑥한 최신식 건물로 보입니다.
그동안 부석사 무량수전이 最古의 건물로 회자되었지만
극락전의 해체 보수공사시 1625년(인조3)에 작성된 상량문이 발견되면서
건물의 역사가 바뀌게 되었답니다.
상량문에는 '前 中創 至正 二十三年 癸卯 三月日'이라는 구절이 있으니
지정 23년 즉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중창하였다는 겁니다.
중창은 대대적인 보수를 의미하지요.
목조건물의 경우 지은 지 2~300년이 지나면 뒤틀린 부재를 바로잡는 등
반드시 중창을 하게되니 적어도 1100년대에 지어졌을 거라는 야그입니다.
그리하여 부석사 무량수전과 최초의 기록을 바꾸게 되었다는 전설입니다.
전각 내부는 방전(네모난 벽돌)이 깔려 있구요.
모셔진 아미타부처님은 그 크기가 뭐 150센티정도 되신다 합니다.
죄우에 협시보살은 모시지 않았지만 후불탱화가 대신하고 있구요.
건축기술상으로 극락전이 지닌 특징은 우선 통일신라 이후 고려까지 것으로
대들보 위에 산 모양의 복화반대공의 배열,
첨자 끝에 쇠서를 두지 않은 점 등 이랍니다.
뭐 처음듣는 야그 이기도??? 걍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또 한가지 고려시대 건물의 특징은 살창과 판문 등입니다.
살창이라 함은 쇠창살에서 연상하시면 뭐 과히 틀리지는 않습니다.
판문은 판자로 만들어진 문이라면 부족한 설명인가요??
사실 살창은 통풍에 유리한 것으로 해인사 장경각을 보시면 이해가 됩니다.
(고금당)
- 보물 제449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금당은 극락전 앞 서쪽에 있지요.
이 건물은 앞쪽 화엄강당과 같은 시기에 같은 목수에 의하여 건축되어
조선시대 중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답니다.
익공계 건물이냐?? 주심포계 건물이냐? 의심이 갑니다만
협의하에 익공에 가까운 주심포 건물로 친답니다.
용도는 법당이 아닌 승방으로 이해하시면 될 듯....
근데 관광객이 넘쳐나니 공부방으로는 부적절 할 것 같습니다.
(화엄강당입니다)
- 화엄강당은 보물 448호로 고금당과의 차별화는 크지 않습니다.
역시 조선 중기 건물로 스님들의 참선공부방으로 사용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영산전입니다)
- 양나라 무제시절 천축(인도)의 달마대사는 파미르 고원을 넘고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중국에 도착하니
인도에서 도인이 오셨다 하여 앞을 다투어 반깁니다.
달마를 만난 무제는
자신이 수 많은 절을 짓고, 탑을 쌓았으며 스님들에게 보시한 공덕이 많은 바
이를 내세우며 그 공덕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묻습니다.
냉정한 달마는 "없다"라는 한마디로 무상함을 이야기합니다.
쫀심이 상한 무제는 달마를 보내버리고,
아직 자신의 법을 펼만한 때가 아니라 판단한 달마는 소림굴에 은거합니다.
여기에서 다시 달마대사의 9년 면벽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뭐 다 이야기를 할 수는 없구요.
어찌되었든 배용균 감독은
달마대사가 무슨 연고로 험준한 산을 넘고 메마른 사막을 지나는 죽음의 여정을
극복하고 중국에서 법을 설하러 하였는가에 대한 의문을 풀고자 합니다.
그 법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풀고자 합니다.
그 무대가 바로 이곳입니다.
우화루라는 누각을 지나면 정면에 응진당, 왼쪽에 송암당, 오른쪽에 관심당,
응진전 옆에 삼성각 등이 오밀조밀하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고즈넉한지 걍 머물고 싶은 생각이 치밀어 오릅니다.
글구 한옥이 이러코롬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손바닥 만한 화단에 정갈하게 가꾸어 놓은 꽃은
뭔 말이 필요 허겄습니까....
(생이 있으므로 사가 있지요)
- 왔으면 가야합니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죽을 일이 없습니다.
결혼하지 않았으면 이혼할 일이 없습니다.
돈이 없었다면 도둑맞을 일도 없었습니다.
- 현상적으로 보니 그렇다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본다면 불생불멸이요,
불구부정이요, 부증불감입니다.
생과 멸이 없으며, 더러움과 깨끗함이 없으며, 늘어남과 줄어듦이 없습니다.
내 생각이지 나는 아닙니다.
내 돈이지 나는 아닙니다. 나의 권력이지 나는 아닙니다.
다만 무상할 뿐입니다. 그러나 영원합니다.
지금부터라도 나를 찾는 여행을 떠납시다.
혜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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